조선 선비의 기상을 보여 준 대표적 인물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율곡 이이는 국정 전반에 거친 개혁 방안을 담은 금과옥조와 같은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으며, ‘시무육조계’(時務六條啓)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지만, 선조와 조선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헌(趙憲, 1544~1592) 선생은 고려의 우탁에 이어 도끼를 들고 상소한 것으로 유명하다. 1589년 도끼를 들고 동인의 전횡을 공격하며 시정의 폐단을 극론으로 상소하다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를 당하였으나, 그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겐소(玄蘇)를 시켜 ‘명나라를 칠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고 요구했다. 이에 조헌은 옥천에서 백의(白衣)로 걸어와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베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력를 강화하라”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강적(强賊)을 이간시키는 일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귀부(歸附)하기 전에 해야 하는데 반드시 현소와 평의지의 목을 자르고 천하에 선포하여 천하 사람들과 함께 소리를 같이하여 격문을 보내되 허점을 노려 수도를 공격한다고 하면 이러한 말이 사방에서 동쪽으로 보고되어 풍신수길도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나라를 엿볼 계책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대궐 밖에서 사흘 동안 선조의 비답을 기다렸으나, 회답이 없자 조헌은 머리를 주춧돌에 사정없이 찧어 피가 흘러 얼굴에 낭자했다. “명년 산골짜기로 도망갈 때 반드시 내 말이 생각날 것이다.” 조헌은 선산이 있는 김포에 가 조상께 마지막 성묘를 올렸다. “세상이 장차 어지러워 영원히 하직하나이다.” 이후 금산 전투에서의 전사가 그의 유언 같은 이 말이 예언처럼 증명이 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헌은 옥천에서 7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영규대사와 합세해 청주성을 탈환했다. 금산 전투에서 “적은 수만 명의 정예군입니다. 어찌 오합지졸로 대결하려 하십니까?”라고 별장이 말하자, 조헌은 “지금 군부가 어디에 계시는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다. 오늘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고 사는 것과 나아가고 물러남에 오로지 ‘의(義)’자에 부끄럼 없게 할 것이다.”라고 답하며 장렬히 전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에 율곡 이이가 올린 상소를 선조가 받아들여 국가혁신을 이루고, 조헌의 상소를 국정에 반영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율곡이나 조헌 같은 선비는 지도자가 지녀야 할 시대를 내다보는 미래지향적 통찰력과 예지력을 갖춘 선지자이다. 조헌은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제자로, 조선 선비의 기상을 보여 준 대표적 인물이다. 율곡의 학덕을 배우고 기린다는 뜻으로 ‘후율(後栗)’이라 자호했으며, 시호는 문열(文烈), 저서로 <중봉집(重峰集)>이 있다.

지당(池塘,연못)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버드나무)에 내 끼인 제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매었는고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더라

조헌이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있을 때 지은 시조이다. 평화로운 저녁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한 폭의 수묵화 같다. 그는 이 시조와 같이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꿈꾸었지만, 존망의 기로에 선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우국충절의 위인이다.

조헌의 개혁론은 후에 실학파 유형원·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박제가는 그의 저서 <북학의>에서 “나는 어릴 적부터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그분들의 말을 끄는 마부가 되어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졌다....” 라며 조헌을 존숭하고 계승하려 했다.
ilyo@ilyoseoul.co.kr

우종철 논설주간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