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강화·이용후생·경제회생 총력 기울인 정치가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한국사에서 18세기는 문예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 한 시기였다. 소모적인 당쟁을 지양하고 탕평을 추구했으며, 생산력을 확대하고 수취제도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전개되었으며, 북학(北學)과 새로운 문체·화풍 등이 나타났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79세의 긴 생애 동안 영조와 정조라는 걸

출한 두 국왕이 이끈 국정의 중심에서 여러 개혁을 추진하고 성공시켰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권을 강화해 국정을 안정시키고,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기초하여 경제회생에 총력을 기울인 정치가였다.

1758(영조 34), 채제공은 39세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이 해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려는 영조의 비망기(備忘記, 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가 내려지자 채제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철회시켰다. 훗날 영조는 정조에게 “참으로 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이라고 말했다.

1780년(정조 4), 홍국영의 세도가 무너지자 채제공은 홍국영과 친하게 지냈다는 점과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 영조가 금한 정책을 부인했다는 죄로 노론의 집중 공격을 받아 이후 8년 간 서울근교 명덕산(수락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788년(정조 12), 정조는 채제공을 우의정에 제수했다. 이 때 체제공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6조 진언’을 상소 했다. ▲황극(皇極, 편파가 없는 곧고 바른 치국의 도리)을 세울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백성의 어려움을 돌볼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으로 조선이 부강해지고 청나라에 대적할 만한 힘을 키우려면 반드시 해야 할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정조는 이 6조 진언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후 정조는 채제공을 개혁의 기수로 세우고 ‘조선의 제2 문예부흥’을 이룩해냈다. 이 때 중용된 인물들은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다.

1790년(정조 14), 채제공은 다시 좌의정이 되었는데, 이때 영의정과 우의정이 공석인 독상(獨相)으로서 3년간을 재직하며 중요한 개혁과제를 추진했다. 이것은 100년 동안 없던 일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이조전랑의 권한을 줄임으로써 당쟁을 완화하고 탕평을 강화하기 위해 이조전랑의 통청권(通淸權, 정3품 이하 주요 문신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과 자대권(自代權, 후임을 자신이 직접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혁파하자고 상소해 관철시켰다.

채제공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 1791)’이다. 이것은 육의전(六矣廛, 비단·무명·종이·모시·생선 등 여섯 가지 주요 물품을 국가에 독점적으로 납부하던 상점)을 제외한 시전(市廛)의 특권을 박탈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이 정책으로 조선 후기의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고 평가된다.

1793년(정조 17), 채제공은 73세의 고령의 나이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명된 지 열흘 만에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 사도세자가 노론과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사망한 사건) 때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에게 책임을 물어 사도세자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해 큰 정치적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채제공은 태종 때의 조준·하륜이나 세종 때의 황희·맹사성처럼 정조의 시대를 대표하는 정승이었다. 그는 한평생 군주를 향한 올곧은 충성과 백성을 위한 위민정신을 실천했으며, 조선의 중흥을 마지막으로 주도함으로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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