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원만 주면 영구장애 진단 해주겠다”


병역면제·국가유공자 등록·공무원 임용 우대 등 악용된 허위 장애진단서
“장애진단 틀리지 않았다” 끝까지 오리발


수년 동안 브로커를 통해 무더기로 허위 장애진단서를 발급해 준 의사가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서울 모 신경과 의사인 그는 이 기간 동안 1400여 건의 허위 장애 진단서를 발급해준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이 의사가 2009년 1월부터 올 3월까지 발급한 장애 진단서로 장애인 등록을 한 1398명에 대해 수사 중이다. 경찰은 이 중 80여 명이 가짜 장애인 것으로 확인했다. 이 의사가 발급해 준 허위 장애진단서는 병역면제와 공무원 임용 등 다양하게 악용되어 온 것으로 경찰 조사결과 드러났다.

2006년 정모(50)씨가 개원한 서울 강남의 모 정신과 의원은 손해보험사(이하 손보사)들 사이에서 ‘장애진단 전문병원’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에 한 손보사 직원 중 한 명이 브로커로 나서면서 브로커들 사이에서도 “정씨 병원은 장애 진단 심사가 까다롭지 않고 손 쉽게 장애진단서가 발급된다”는 소문이 발 빠르게 퍼졌다.

브로커들이 나서자 허위 장애진단서를 발급받아 각종 장애 혜택을 누리려 정씨 병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갔다. 브로커들은 “300만 원만 내면 영구장애 진단을 받아 평생 각종 장애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며 의뢰자들을 꾀어냈다.

돈만 내면
장애 진단서 무차별 발급


광주지방경찰청 관계자는 “한마디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싼 값에 평생 장애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 많은 의뢰자들을 불러 모았다”며 “의뢰자들 중에는 허위 장애진단서를 받은 후 자신이 직접 브로커로 나선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정씨는 허위 장애진단 의뢰자들에게 간단한 엑스레이 검사 등을 한 뒤 관절 장애가 있다며 바로 허위 장애진단서를 발급해 줬다. 이처럼 정씨는 신경과 의사이면서도 대부분의 장애진단서는 정형외과 영역으로 분류되는 ‘관절장애’로 허위 진단했다.

정씨는 하루 20건씩 장애진단서를 발급해주기도 했다. 또 엑스레이가 잘못 촬영된 필름을 가지고도 ‘척추 1번에 압박 흔적이 있음’이라고 장애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장애진단에는 한시장애와 영구장애가 있다”며 “정씨가 내린 장애진단은 모두 영구장애진단이었다. 타 병원의 경우 영구장애 진단은 매우 드문 경우로 한 달에 단 한 차례의 영구장애 진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고 밝혔다.

정씨는 허위 장애 진단서를 발급해 준 뒤 브로커들에게 검사비 명목으로 30만~100만 원까지 받아 챙겼다. 브로커들은 의뢰자들로부터 200~500만 원씩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정씨는 2009년 1월부터 올 3월까지 총 1400여건의 허위 장애진단서를 발급해줬다. 의뢰자 중에는 직접 정씨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지 않고 돈만 건넨 후 허위 장애진단서를 구매한 사람도 있었다.

의뢰자들이 허위 장애 진단을 받아 장애인으로 등록한 뒤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무궁무진했다. 허위 장애진단서는 다양하게 이용됐는데, 병역면제를 받거나 군복무 또는 공무상 부상을 입었다며 국가유공자로 등록하고, 국민임대주택을 우선 분양받았다. 이 뿐 아니었다. 장애 보험금을 수령 받고 공무원 임용 시 우대받기도 했다. 또 LPG 차량 구매와 차량 등록세, 취득세, 통신료 인하, 국내선 비행기 요금, 열차요금 등 60여 개가 넘는 혜택을 받았다.

60여개 장애혜택 노린 의뢰자

충남에 사는 정모(36)씨도 의뢰자 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2년 전 브로커의 꾐에 200만 원을 주고 정씨에게 허위 장애인 진단서를 발급 받았다. 그는 허위 장애인 진단서로 교원특별채용에 응시해 공무원에 합격했다. 경찰은 이 병원에서 장애진단서를 발급받은 1398명 중 공무원이 80여 명으로 이 가운데 20여 명이 2009년 이후 신규 임용된 사실에 주목해 장애인 특별채용 여부를 캐고 있다. 경찰은 장애인 특별전형으로 임용된 의뢰자의 경우는 해당 기관에 통보할 예정이다.

경찰은 케이블TV에서 활동 중인 유명 모델 구모(27)씨 등 9명이 이 병원에서 허위 장애진단서를 발급해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구씨는 병무청 1, 2차 신체검사에서 모두 현역 판정이 나왔으나 허위 장애진단서를 병무청에 제시해 습관성 탈구로 병역을 면제 받았다. 보건복지부에 장애인으로 등록되면 재검진 없이 병무청 재신검이 면제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경찰은 또 LH, SH에서 장애인에게 우선 분양되는 국민임대주택을 분양받은 3명을 확인했으며 군복무 또는 공무상 부상을 입었다며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한 국가유공자 10명을 통보받아 수사 중에 있다.

경찰은 지난 6월 1일 오른쪽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타이어 가게를 운영한다는 첩보를 바탕으로 수사에 착수해 중간브로커, 최종 브로커를 확인하고 정씨 병원에 대해 압수를 집행했다. 압수한 진료차트 1398건을 분석한 결과 정씨가 비장애인 80여명에 허위 장애진단서를 발급한 것을 확인했다.

끝까지 오리발 내민 병원장

경찰은 정씨의 장애진단서 25건에 대해 대학병원을 포함한 3개의 정형외과 전문의에게 감정 의뢰했다. 그 결과 모두 정상으로 회신 받았으며 한 정형외과 전문의는 정씨에 대해 ‘이 장애 진단을 한 이 의사는 의사로서 자질이 의심된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씨는 “정형외과 의사가 관절장애는 더 전문이나 나와 견해가 다를 뿐, 내 장애진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정책 허점이 드러났다. 올 4월 이전에는 장애 1~3급은 국민연금공단에서 직접 장애진단을 했다. 하지만 4~6급은 최소한의 검사 장비(근전도 검사장치, 엑스레이 촬영시설 등)를 갖춘 개인 병원에서 발급한 장애진단서를 근거로 별다른 확인절차 없이 주소지 동사무소에서 장애인 등록이 가능하다.

또 지난 4월 1일부터 모든 등급의 장애인에 대해 국민연금공단에서 직접 장애진단을 하고 있지만 제도 시행 이전에 의사로부터 영구장애 진단을 받고 등록한 장애인에 대해서는 재심사가 불가능하다. 이들은 이 같은 보건복지부 장애인 정책을 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복지부는 각 동(면)사무소별로 관리하고 있는 장애 진단서를 데이터 베이스화 해 수사 받은 전력 있는 병원에서 발급한 장애진단서에 대해서 전면적인 재심사를 하는 등 제도적 보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경찰 관계자는 또 “이번 수사를 통해 전국 최대 규모의 가짜 장애인들을 적발했다”며 “정씨 병원이 개원한 것은 2006년이나 수사여건상 2009년 이후의 가짜 장애인만 수사했다. 2009년 이전에도 허위 장애진단서 발급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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