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수룩한 수염과 긴 머리, 개량한복, 고무신 그리고 검게 그을린 얼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강기갑 의원은 영락없는 촌부다. 그러나 그의 인생역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여느 농부와는 다른 모습이 눈에 띈다. 그는 지난 1976년 가톨릭농민회에 참여한 뒤 같은해 함평 고구마 사건, 79년 안동 오원춘 사건 등 굵직굵직한 농민운동의 현장에 항상 있었다.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장, 사천시농민회 회장,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경남도연맹 의장, 전농 부의장 등 이력도 화려(?)하다. 특히 지난해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를 주도했고, 멕시코 칸쿤으로 날아가 세계무역기구(WTO) 협상 반대시위도 벌였다. 강 의원은 또 작년 6월 경남도청에서 외교통상부 주최로 열린 ‘도하개발어젠다 지방순회 설명회’를 저지하고, 작년 종묘공원에서 열린 민중대회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집시법과 도로교통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상태.이에 대해 강의원은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며 “사법부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지 않겠냐”고 낙관했다.

이처럼 그가 농민운동에 뛰어들어 화려한 이력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1971년 사천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젖소, 과수 농사를 시작했다”는 강 의원은 “볍씨 종자를 강제로 할당하는 등 당시의 농촌은 농민들의 자유로운 경작활동을 제재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며 “농협이나 관공서의 ‘주객이 전도’된 고압적인 자세는 ‘떡값’의 관행화를 불러오는등 폐단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강 의원은 이어 “이 같은 문제점들을 개선하려고 하다보니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종교에 따라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게 됐다”며 “그렇게 발을 들여놓은 뒤 벌써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전력은 그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 듯하다.강 의원은 “개인의 의회진출이 아니라 전국 350만 농민의 대표로서 의회에 진출한 만큼, 그들의 요구를 다 받아 안아야 한다는 것이 실로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강 의원은 그러나 “농업이 환경보전산업이자 경제기반산업이라는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몸바치고 싶다”며 “우리 농촌을 살리는 길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다짐했다.한편 ‘농민투사’인 그 역시 한 때 수도사가 될 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82년 전두환 군사독재가 본격화하자 인천의 한 수도원에서 6년간 신학공부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87년에 다시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투쟁에 나섰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그 때부터는 ‘농촌총각 결혼대책위’를 꾸려 130여명의 배필을 찾아줬고, 그 역시도 대책위에서 함께 일하던 박금옥씨와 결혼에 골인했다.그리고 현재 강 의원은 여느 농민과 마찬가지로 1억여원의 농가부채를 ‘끌어안고’ 과수원 5,000여평에서 젖소 100여두를 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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