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그가 농민운동에 뛰어들어 화려한 이력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1971년 사천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젖소, 과수 농사를 시작했다”는 강 의원은 “볍씨 종자를 강제로 할당하는 등 당시의 농촌은 농민들의 자유로운 경작활동을 제재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며 “농협이나 관공서의 ‘주객이 전도’된 고압적인 자세는 ‘떡값’의 관행화를 불러오는등 폐단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강 의원은 이어 “이 같은 문제점들을 개선하려고 하다보니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종교에 따라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게 됐다”며 “그렇게 발을 들여놓은 뒤 벌써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전력은 그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 듯하다.강 의원은 “개인의 의회진출이 아니라 전국 350만 농민의 대표로서 의회에 진출한 만큼, 그들의 요구를 다 받아 안아야 한다는 것이 실로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강 의원은 그러나 “농업이 환경보전산업이자 경제기반산업이라는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몸바치고 싶다”며 “우리 농촌을 살리는 길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다짐했다.한편 ‘농민투사’인 그 역시 한 때 수도사가 될 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82년 전두환 군사독재가 본격화하자 인천의 한 수도원에서 6년간 신학공부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87년에 다시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투쟁에 나섰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그 때부터는 ‘농촌총각 결혼대책위’를 꾸려 130여명의 배필을 찾아줬고, 그 역시도 대책위에서 함께 일하던 박금옥씨와 결혼에 골인했다.그리고 현재 강 의원은 여느 농민과 마찬가지로 1억여원의 농가부채를 ‘끌어안고’ 과수원 5,000여평에서 젖소 100여두를 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