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功·言 3가지 장점 갖춘 유가적(儒家的) 인물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이제현(李濟賢, 1287~1367)은 ‘자주성을 잃은 고려’라는 미증유의 민족수난기에 일곱 왕(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네 번이나 시중을 지낸 경륜의 정치인이요, 대학자요, 시인이요, 역사가다. 본관은 경주,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제현은 1287년 이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 이금서(李金書)의 후예인 이진은 신흥관료로 크게 출세하여 재상급인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역임하여 관료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백가에 박통하고 시에 능했다.

이진은 형님과 동생이 불행히 일찍 죽자 조카들을 잘 가르쳐서 대대로 가업(家業)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형님의 두 아들과 동생의 아들, 그리고 자신의 장남 이관과 삼남 이제현 등 5명이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고려 역사에는 특이하게 ‘원간섭기(元干涉期)’가 있었다. 한족(송)·거란(요)·여진(금)과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균형을 이루며 강성했던 고려는 13세기 초 몽골의 침략으로 국운이 쇠약해졌다. 고려가 대몽항쟁 끝에 강화를 성립시킨 1259년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한 1356년까지 97년 동안을 ‘원간섭기’라 부른다.

이제현은 1301년(충렬왕27)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성균시(成均試, 진사를 뽑던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곧 과거에 급제하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 벼슬에 올라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1308년에는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전교시승·삼사판관·서해도안렴사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이 당시 벌써 이제현은 “학문과 문장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라는 말을 들었다. 조선의 명재상 유성룡도 “이제현은 덕(德)·공(功)·언(言) 3가지 장점을 고루 갖춘 고려 5백년 동안의 유일한 유가적(儒家的) 인물이며, 고려 5백년을 통틀어 이제현 만한 인물이 없다”고 평하였다.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로서 몽골 정치에도 참여한 제26대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13)은 고려 왕위에 복위했지만 곧 아들(충숙왕)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 북경)에 머물렀다. 그곳에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서재를 짓고 중국의 유명한 성리학자들을 초빙하여 서사(書史)를 즐겼다.

충선왕은 이때 원나라를 대표하는 조맹부·요수·염복·원명선 등 학자·문인들과 상대할 고려 측의 인물로서 약관 28세의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후 충선왕이 세력을 잃고 유배되자, 유청신(柳淸臣)·오잠(吳潛)은 “고려가 원나라의 종속상태로 지낼 바에는 차라리 원나라의 내지(內地)와 같은 행성(行省)이 되는 것이 낫다”는 매국적인 ‘입성책동(立省策動)’을 제기했다.

이에 이제현은 1323년 원에 들어가 중서성(中書省)에 입성책동 반대상소를 올렸다. 원나라 조정은 이제현의 당당하고 힘찬 문장의 빼어남에 놀라고, 역사적인 증거와 이치에 맞는 내용에 감탄했다. 결국 입성책동은 원나라 승상 배주(拜住)·왕약(王約)·회회(回回) 등의 협조로 없던 일이 됐다. 이제현의 입성책동 저지는 고려가 중국의 속국이 되는 것을 막아낸 민족사의 대결단이었다.

이에 이제현은 1323년 원에 들어가 중서성(中書省)에 입성책동 반대상소를 올렸다. 원나라 조정은 이제현의 당당하고 힘찬 문장의 빼어남에 놀라고, 역사적인 증거와 이치에 맞는 내용에 감탄했다. 결국 입성책동은 원나라 승상 배주(拜住)·왕약(王約)·회회(回回) 등의 협조로 없던 일이 됐다. 이제현의 입성책동 저지는 고려가 중국의 속국이 되는 것을 막아낸 민족사의 대결단이었다.

1351년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이 즉위하자, 이제현은 65세에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공민왕의 정치가 충목왕대 개혁의 연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제현은 1357년(공민왕6) 71세로 치사(致仕, 은퇴)한 후, 1367년(공민왕16) 81세를 일기로 ‘고종명(考終命)’했다. 고려의 대표 문인 이색(李穡)은 해동(海東)의 석학이었고 대정치가였던 이제현의 묘지명에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최고봉이다”라고 새겼다.

이제현은 ‘조선 3천년의 대가(大家)’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역대의 수많은 시화집에 거론되었다. ≪동문선≫에 최다수의 작품이 실린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았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현이 쓴 책들 중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옹패설≫4권, 습유(拾遺, 빠진 글을 보충한 것) 1권이 있으며, 이것을 합쳐서 흔히 ≪익재집≫ 이라고 한다.

이제현은 젊어서는 개혁군주 충선왕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했다. 장년에는 어린 충목왕의 개혁방향을 제시했다. 노년에는 공민왕의 초기개혁을 진두지휘해서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현은 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까지 6대를 내리 섬기며 각 왕들이 원나라 내부의 간신배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몸을 던져 보호했다.

고려를 홀로 지켜낸 이제현의 사상은 제자 이색에 고스란히 전수되어 조선의 국가 이념이 되는 성리학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그 후 이색의 문인인 정몽주·정도전·권근과 그들의 학문을 이은 김종직·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이제현은 빼어난 유학 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학 사상은 최승로·최충·김부식의 사학 사상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고려사≫에는 그의 ≪국사≫에 실린 사론이 종종 인용되고 있다. 이 글들은 당대사의 기술과 왕조사를 정리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철저하게 객관적이면서 대의명분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냉철한 필치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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