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등용·실리외교 돋보인 유성룡 리더십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선견지명적인 인재등용과 구국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경세가요, 명재상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다.

유성룡은 1542년(중종37) 10월에 경북 의성군 외가에서 황해도관찰사 유중영과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성룡은 16세 때 향시에 급제한 후 1562년 가을, 21세 때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에 매진했다.

유성룡은 25세 되던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어놓았다. 이후 28세에는 공조좌랑에, 30세에는 병조좌랑에, 35세에 사간원헌납에, 38세에 부제학에, 49세에 우의정에, 이듬해 좌의정·이조판서를 겸하다가, 1593년 52세에 영의정에 오르는 등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유성룡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호학군주 정조(正祖)였다. 그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 ‘인물’ 조에서 유성룡을 이렇게 상찬했다.

“저 헐뜯는 사람들을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고 상신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 백명이 있어도 어찌 감히 고 상신이 했던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했겠는가. 옛날 당 태종이 이필(李泌)에 대해서, ‘이 사람의 정신은 몸보다 크다’라고 말했는데 나도 서애에 대해서 또한 그렇게 말한다. 대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 거인의 뜻이 있었다.”

조선 제 14대 왕 선조(宣祖, 재위:1567〜1608)는 1592년 6월 11일 평양을 탈출해 영변으로 피했다가, 6월 22일 의주에 당도했다. 급기야 승지 이항복에게 “명나라에 내부(來附, 자기 나라를 다른 나라에 들어 바치는 것)하여 몸을 보전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유성룡은 선조의 면전에서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그 때부터 조선은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大駕離東土一步 卽朝鮮非我有也)”라며 서릿발같이 임금의 행차를 막아섰다. 그는 선조와 조정의 여론을 ‘망명에서 항쟁으로’ 돌려놓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전란 극복을 위한 유성룡의 다음과 같은 미래지향적 리더십은 많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첫째, 날카로운 ‘인재등용’의 리더십이다. 왜군의 동태를 수상히 여긴 그는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했고, 형조정랑으로 일하던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둘째, 민생을 위한 ‘애민정신’의 리더십이다. 대부호와 전호(佃戶, 소작인)에게 똑같은 세금을 부과하던 공납(貢納)의 폐단을 개혁했다. 임란 와중에 그는 최초로 뒷날 대동법이라고 불린 ‘작미법(作米法)’을 실시했다.
셋째, 능수능란한 ‘실리외교’의 리더십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해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쳤다.
넷째, 탁월한 ‘제도혁신’의 리더십이다. 유성룡은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을 타파하는 혁명적 개혁이 아니면 망한 나라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대동법·중강개시·면천법·호포법·속오군제도 등을 실시했다.

1598년 11월 19일,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유성룡은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1598년(선조31) 10월 2일. 57세의 영의정 유성룡은 사의를 표명한 후 고향인 하회마을(河回里)로 낙향한 후 집필활동에 몰두했다. 마침내 1604년(선조37) 63세가 되는 해에 국보 제132호 ≪징비록(懲毖錄)≫을 완성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경과·결과를 피와 땀과 눈물로 쓴 ‘임진왜란의 종군기록’이다. 백성과 사직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 반성의 기록문이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징비(懲毖)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다’라는 뜻이다. ≪시경(詩經)≫의 송(頌)편에 ‘소비(小毖)’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첫 구절에 ‘내가 지금 깨우치고 경계하는 건 후환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네(予其懲, 而毖後患)’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징(懲), 비(毖) 두 글자를 따온 것이다.

1607년(선조40) 병이 깊어진 유성룡은 5월 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였다. 유성룡이 피눈물로 그려낸 ‘징비록 교훈’을 조선의 왕들과 위정자들은 금세 잊어버렸다. 조선의 계속된 비극은 속오군이나 작미법과 같은 유성룡의 개혁입법이 임란 후 모두 폐기되어 생명력을 잃은 데서 찾을 수 있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면 반드시 가혹한 재앙이 따르는 법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30년 후에 일어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다시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정치인은 실정을 거듭하고 강한 군대를 갖지 못했다. 결국 일본에 나라를 잃는 국치(國恥)의 비극을 겪게 된다.

자유와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 없으면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천하가 비록 아무리 편안할지라도, 전쟁을 잊어버린다면 반드시 위기가 찾아온다’는 말이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어야 한다.

국가위기상황 극복을 위한 항구적인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준비태세가 필요하다. ≪징비록≫의 교훈은 단 하나다. 더 이상 제2, 제3의 ≪징비록≫ 같은 책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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