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에 걸쳐 여섯 차례 ‘초가집 정승’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조선 왕조 중기인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한 정권에 두 번씩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한 명재상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88세로 장수한 까닭에 임진왜란(45세, 이조판서)-인조반정(76세, 영의정)-정묘호란(80세, 영중추부사)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다.

이원익은 태종의 열두 번 째 아들인 익녕군 이치의 4대손이다. 아버지 함천군 이억재는 부인 단양 우씨와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뒤에 사헌부 감찰 정치의 딸인 동래 정씨와 혼인하였다. 이원익은 1547년(명종2) 음력 10월 24일 한양의 유동천달방(지금의 동숭동)에서 4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원익은 열세 살 때인 1559년(명종14)에 동학(東學, 4학 중의 하나)에 입학해 공부했다. 4년 만인 1563년(명종18)에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당시 윤형원 일파의 전횡에 따른 시험부정 사건으로 그 시험이 통째로 무효 처리되고 말았다. 18세가 되는 이듬해(1564년)에 비로소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 시험은 율곡 이이가 주관한 시험이었다.

생원 이원익은 성균관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준경은 명종의 고명대신으로 명종의 사후 하성군(河城君, 선조)을 보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원익은 사마시에 합격한 5년 뒤 23세 때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1569년, 선조2)했다.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종9품)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이후 35세(1582년)까지 호조·예조·형조좌랑, 사간원 정언(이상 정6품), 예조정랑, 홍문관 응교(이상 정5품) 같은 주요한 당하관직(堂下官職)을 거쳤다.

이원익이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3대에 걸쳐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첫째,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동료 관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둘째, 청백리로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받을 정도로 군주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셋째, ‘우리 대감’으로 불릴 정도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원익은 관직생활 64년 중 40년을 재상으로 봉직한 ‘직업이 재상’인 인물이다. 또한 세 명의 임금을 모시는 동안 영의정만 6번씩이나 지내면서도 비바람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 두 칸 초가집에 산 ‘초가집 정승’이자 청백리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 황희(黃喜), 숙종 때 허목(許穆)과 더불어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받은 3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이원익은 남인이라는 소수 정파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대동법을 강력히 추진했고, 붕당의 폐단 극복과 능력위주의 인사정책 등 국정전반에 걸친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원익은 ‘안민제일(安民第一)’과 ‘안민국승(民安國勝)’의 신념을 일관되게 지켰다. 또한 화합·설득·포용의 리더십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에 진력함으로써 반대 당파 인사들조차 감히 그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존경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재가 넘쳤다는 선조시대에 선조(宣祖, 재위:1567〜1608)는 “우리나라에는 오직 이원익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1608년 광해군(光海君, 재위:1608〜1623)이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부왕의 뜻에 따라 전대(前代)의 영의정인 이원익을 자신의 첫 수상에 그대로 임명했다.

광해군의 내치(內治)는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이원익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감 등을 간쟁했다.

광해군의 급진적 개혁은 성리학의 명분론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사림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폐모살제(廢母殺第, 인목대비 폐위와 영창대군 살인, 계축옥사癸丑獄死)’를 명분으로 내세워 광해군을 축출하는 ‘인조반정(1623)’을 일으켰다.

인조(仁祖, 재위:1623~1649)가 왕위에 오르자 77세의 노대신 이원익은 다시 한 번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원익의 삶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항상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변호하는 ‘신념과 의리’를 지켰다는 점이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순신을 변함없이 옹호한 대신이었다. 또한 유성룡이 ‘왜와 밀약을 맺었다’는 혐의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이원익은 자리를 걸고 유성룡을 적극 변호하다가 결국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원익은 임해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영의정 자리를 내려놓았다. 이후 ‘인목대비폐위’ 문제가 불거지자 상소를 올려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오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뒤 광해군을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을 때도 이원익은 “광해군을 사사한다면 그 밑에서 영의정을 하였던 나도 벌해야 한다”고 맞서 광해군의 목숨을 보호하기도 했다.
이원익의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가사로는 <고공답주인가>가 있다. 자신을 내세우거나 과시하지 않는 겸손하고 순박한 삶을 영위한 이원익. 국로(國老)의 영예와 국란(國亂)의 고난이 교차한 88세의 긴 생애가 후세의 귀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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