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서울 도심을 쳇바퀴 돌듯 생활하는 에디터에게, 부산은 살아있음의 표본이자 날것의 싱싱함 그 자체였다. 이번 여행은 해운대나 광안리가 아닌 부산의 수많은 골목을 따라 걸으며 가장 부산다운 풍경을 만나는 여정에 있다. 부산의 숨겨진 매력이 궁금하다면 따라와도 좋다. 화려함과 애환이 공존하는 부산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출발은 언제나, 부산역

1905년 1월 1일부터 운행을 시작한 경부선 열차는 파발마로 사흘 이상 걸리던 서울~부산의 거리를 12시간으로 단축시켰다. 우리나라 육상 교통 역사에서 가히 혁명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2004년 이후 부산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서울에서 KTX로 2시간 30분이면 부산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부산역에 도착하니 화제가 되고 있는 ‘국제시장’의 큼직한 포스터가 역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형 포스터 아래 부산 원조 수제어묵으로 손꼽히는 삼진어묵 베이커리가 보인다.

▲ 삼진어묵
평일임에도 긴 줄이 그 인기를 실감케 한다. 영도구 봉래동시장에서 시작된 삼진어묵은 현재 3대를 이어온 부산 어묵의 자존심이다. 영도 공장에 역사관까지 설립해 그 위엄을 뽐내고 있다고 하니 맛보지 않을 수 없다.

그깟 어묵이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을 일축시키는 탱글탱글하면서도 쫀득한 수제어묵의 맛. 확실히 도심 속에서 흔히 먹던 퉁퉁 불어터진 어묵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묵을 먹으며 행인들의 사투리를 들으니 본격적으로 부산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광안리나 해운대 말고,
초량 이바구길

부산역 광장을 빠져나와 길을 건너면 텍사스 골목이 시작된다.

주한 유엔군과 외국인들의 유흥가로 50~60년대만 해도 화려하게 흥청거리던 곳이다. 그러나 부산의 관문인 부산역 주위에 유흥가가 있다는 것을 두고 논란이 커지자 텍사스 골목의 붉은 빛은 차츰 식어 갔다.

현재는 러시아인들이 운영하는 잡화점과 음식점만이 남아 있어 과거의 화려했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바구길에 문을 연 까꼬막 게스트 하우스
텍사스 골목을 지나면 초량동 이바구길이 시작된다.

‘이바구’란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오죽 사연이 많으면 이름이 이바구길이다. 6·25전쟁을 관통하며 재난 수준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근현대사의 추억들이 살아있는 곳. 전쟁으로 피난민이 급증했던 부산항 일대는 자연스럽게 달동네가 형성되었고, 고단했던 삶이 오르내리던 산복도로는 현재 옛 시절의 정취를 드러내는 정겨운 풍경이 됐다.

부산 종합병원 1호인 백제병원과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인 남선창고, 산동네 아이들이 다니던 초량초등학교, 그리고 부산항까지 내려오는 가장 빠른 길인 168계단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만큼 가파른 계단에 멈춰 부산항을 바라본다.

이바구길 사진 자료에 자주 등장하던 바로 그 계단이다.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물동이까지 이고 168계단을 오르던 한 어머니의 흑백사진이 계단 위로 오버랩됐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가파른 계단만큼이나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이바구길. ‘부산’하면 이유 없이 설레면서도 정작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이 길을 따라 걸어보길 추천한다.

▲지역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168도시락국 /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168계단
▲시인 유치환 우체통
흔하거나 새롭거나,
부산의 재래시장

부산 하면 국제시장이 떠오르는 현상은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 때문만은 아니다.

특유의 생동감으로 늘 인산인해를 이루는 남포동 일대의 시장들은 여전히 부산 제일의 거리다. 남포동 투어는 부산국제영화제로 유명한 BIFF광장에서 시작된다.

창선동 먹자골목으로 불리는 길목을 지나 국제시장, 부평깡통시장까지 한 번에 돌아볼 수 있다. 먼저 BIFF광장에 들어서면 영화제 시상식을 방불케 하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바로 먹거리를 팔고 있는 노점들 때문이다. 씨앗호떡, 닭꼬치, 비빔당면, 납작만두, 충무김밥, 유부보따리, 생크림와플, 오징어 초무침, 찌짐(부추전)과 같은 길거리 음식들이 모두 5000원 미만이다.

1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어슬렁거리다보면 금세 배가 불러온다.

▲ 영화 '국제시장' 꽃분이네 / 먹거리 골목
전쟁으로 부산까지 내려온 피란민들이 부산항으로 밀수입된 갖가지 물건들을 내다 팔던 곳이 지금의 국제시장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해 화제가 된 ‘꽃분이네’ 잡화점을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 입구 쪽 바리게이트에 큼직하게 써놓은 ‘영화 촬영지’라는 플래카드 덕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흥행만큼이나 수많은 인파가 가게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느라 북새통을 이룬다. 주로 기계 공구, 의류를 판매하는 국제시장과 갖가지 수입 제품이 가득한 부평깡통에서는 넘쳐나는 먹거리로 잠시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 빈대떡, 볶음국수, 부추전, 자갈치 빵 등 만 원의 행복, 아니 만 원의 만찬이다.

오래돼서 스타일리시한,
빈티지숍 

국제시장은 최근 패션 피플들의 주목을 받는 무대이기도 하다.

빈티지숍 골목 때문이다. 길거리에 무더기로 옷을 쌓아놓은 곳부터, 웬만한 부티크 못지않은 숍까지, 국제시장은 빈티지의 총집합체이다.

꽤 많은 옷을 고른 이가 건네는 돈을 얼핏 보니 모두 1000원짜리뿐. 목욕탕 의자에 앉아 바닥에 쌓인 구제 옷들을 고르고 있는 풍경조차 정겹다.

바닥에 쌓인 구제 옷들은 이렇게 단돈 1000원부터 시작한다. 아동복, 중고 명품, 리폼 숍, 모자 가게, 큰 옷 전문점을 지나다 보니 시선을 사로잡는 숍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원색으로 강렬하게 칠해진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진다. 마치 유럽에 온 듯 아기자기한 소품과 틀을 깨는 디자인이 돋보이는 옷들이 마네킹을 덮고 있다.

독특한 디자인의 의류 사이를 걷다 보니 입고 있는 무채색의 점퍼가 시시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잠시 취재를 잊고 빈티지 숍을 누비며 보물찾기 삼매경에 빠져본다.

처음 이 일대에 빈티지 숍들이 생겨날 당시만 해도 특이한 옷을 찾는 개성있는 사람들만의 거리였지만 지금은 입소문이 나서 꽤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기하학적인 무늬로 수놓인 야상 점퍼를 만지작거리다 결국 돌아섰다. 아직 봄 점퍼를 구입하기엔 계절이 너무 이른 탓인지, 아님 이토록 개성 넘치는 옷을 입기엔 내공이 부족한 탓인지는 모를 일이다

책다운 책,
보수동 헌책방 골목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책들 사이로 굵직한 영어사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어사전의 주인은 3학년 3반 이아무개. 매직으로 몇 번이고 덧칠한 이름은 손때가 묻긴 했지만 여전히 선명하다.

지금은 어엿한 성인, 아니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이름에 잠시 미소짓게 되는 곳. 보수동 헌책방 골목이다.

1950년 6·25전쟁 이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부터 시작됐으니 역사가 있는 골목이다. 손 씨 부부로 알려진 한 부부가 보수동 입구에서 좌판을 열고 미군 부대의 만화, 잡지, 각종 헌책 등을 팔던 것을 시작으로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두고간 책까지 더해져 헌책방들이 골목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수동 골목을 추천한 한 부산 사나이는 이곳을 학창 시절의 추억이 녹아 있는 곳이라고 했다.

문제집을 사겠다고 부모님께 받은 용돈은 딴 곳에 쓰고 보수동 일대에서 헌책을 구매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그. 지금은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오직 헌책방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소중한 옛 책들이 여전히 많은 이들의 발길을 이곳으로 잡아끈다.

어지럽게 쌓여 있는 헌책들 사이에서 절판된 도서라도 찾았는지 한 손님이 탄성을 내뱉는다. 오늘은 어떤 보물을 캐볼까. 서점에 들어서는 이들의 눈빛에 호기심이 어린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자갈치시장

추억도 찾고 보물도 캐다 보니 어느새 자갈치시장 앞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부산 시간 여행이 금강산보다 매력적이었나. 싱싱한 수산물 앞에서 절로 군침이 넘어간다.

흔히들 부산을 식도락 여행지로 꼽는 이유가 바로 이 해산물 때문이다. 좌판이 늘어서 있는 시장은 수많은 행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상인들의 목소리와 비릿한 생선 냄새가 한데 섞여 ‘살아있는’ 부산의 정취를 제대로 보여준다.

연탄불에 구워주는 곰장어와 즉석 고등어구이, 통통한 해산물을 인심 좋게 얹어 지져낸 파전이 여행자의 구미를 당긴다. 생선이라곤 굴비나 오징어밖에 모르던 내게 이름도 아리송한 해산물들이 천지빼까리다. 한마디로 많아도 너무 많다.

색색의 플라스틱 바구니에 무심한 듯 올려놓은 해산물과 잘 마른 빨래처럼 매달려 있는 건어물을 지나는 동안 구수한 사투리가 발목을 잡는다. 눈길만 주어도 알아차리고 “보소, 보소” 흥정을 해오는 상인들을 향해 전날 배운 사투리를 한마디 건넸다. “이모 쫌”

<프리랜서 김소연 기자>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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