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증세’·‘방납 폐단’조세 수취 체제 바꿔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김육(金堉, 1580~1658)은 인조·효종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이다. 조선 최고의 조세개혁인 ‘대동법(大同法)’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대동법의 ‘살아있는 화신’이었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김육은 조선조 인물들 가운데 백성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최고의 개혁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의 대동법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는 대동법이 시행될 당시 “백성들은 밭에서 춤을 추고, 개들은 아전을 향해 짖지 않았다”는 말이 떠돌 정도라는 데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육은 선조 13년인 1580년 7월 14일 한양 마포에 있는 외조부 조신창(趙新昌)의 집에서 태어났다. 기묘사화 때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던 ‘기묘팔현’의 한 사람인 청풍김씨의 중시조 김식(金湜, 1482~1520)의 고손자이며, 강릉참봉 김흥우(金興宇)의 아들이다. 모친인 한양 조씨는 조광조(趙光祖)의 아우 조숭조의 손녀였다.
김육은 이황의 제자였던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에게 처음 가르침을 받다가 15세 때 해주에 가서 율곡 이이의 문인인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육의 좌우명은 ‘만물을 사랑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뜻의 ‘애물제인(愛物濟人)’의 정신이다. ‘애물제인’의 정신에 바탕한 김육의 정치경제 사상은 ‘이식위천’(以食爲天,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과 ‘안민익국’(安民益國,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에 이롭다)의 실사구시에 있었다.

김육은 26세 때인 1605년(선조3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탄탄대로를 걷던 김육은 1610년(광해군2)에 태학생(太學生)의 신분으로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등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해 달라’(‘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런데 당시 집권당인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온당치 않는 일”이라는 상소문을 올려 반대하고 나섰다.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 역할을 한 조식(曺植)의 제자였던 정인홍은 자신의 스승을 제외한 이황의 문묘 종사를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김육은 재임(齋任, 성균관의 학생회장)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성균관 유생들과 상의한 끝에 청금록(靑襟錄, 유학자의 명부)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김육은 환로(宦路, 벼슬살이를 하는 길)가 막혀 버린다. 대북파는 김육의 문과 응시 자격을 박탈했다.

김육은 1613년(광해군5) 34세 때 하릴없이 성균관을 떠나 가평 잠곡(潛谷, 청평면) 청덕동(淸德洞)에 은거했다. 이때부터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하였다. 김육은 만약 백성과 관리와 임금(나라)의 이해관계가 달랐을 경우 먼저 ‘백성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는 맹자의 ‘민귀군경(民貴君輕)’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같은 김육의 ‘민본사상’과 ‘개혁사상’은 잠곡의 10년 농부의 삶을 통해 체득된 것이었다.

1623년(광해군15)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김육은 6품직의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마흔 넷의 나이에 처음 얻은 벼슬이었다. 이듬해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대동법은 효시인 율곡 이이부터 유성룡-이원익-조익-김육 등을 거쳐서 완성, 시행되었다. 김육은 1636년(인조14)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인조 재위 기간에는 진전되지 않았다.

마침내 1649년에 효종(孝宗, 재위:1649~1659)이 즉위했다. 그해 5월 효종은 김육을 사헌부 대사헌에 특별히 발탁했으며, 동년 9월 특진시켜 우의정을 제수했다. 1654년 6월에 75세의 김육은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했다.

대동법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킨 조선 최고의 개혁정책으로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에서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첫째는, 토지 소유와 상관없이 가구 단위로 부과하던 공물을 토지 소유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하도록 바꾼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난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부자의 세금을 늘린, 요즘 식으로 말하면 ‘부자 증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지방 토산물을 거두어들이는 조세 방식을 쌀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바꾼 것이다. 이것은 현물의 납부에 따른 ‘방납(防納)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주었다.
김육의 집념으로 결국 숙종 때(1708년) 대동법은 제주도·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되어 완성되었다. 대동법으로 조선 사회는 되살아났다. 그 결과 조선은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경제부흥과 문화융성을 맞이할 수 있었다.

대동법은 단지 하나의 조세정책이 아니라,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 민생을 증진시키려 했던 ‘개혁담론’이었고 ‘시대정신’이었다. 대동법이 아니었다면 조선의 종말은 100년은 일찍 왔을 것이다.

김육은 “대신이 명예를 좋아하고 비방을 두려워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혼자서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재상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 같은 김육의 일생을 뒤돌아보면 ‘민생을 돌보는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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