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9월 18일 새벽 1시35분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대포동 마을 해안에 정체 불명의 선박이 몸체 절반을 드러낸 채 좌초된 것을 택시기사 이진규씨(36)가 발견,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에 신고함으로써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은 시작됐다.


북한 잠수함은 군당국의 정밀조사결과 94년 12월 함남 신포 ‘봉대보이라공장’(잠수함 건조기지)에서 만든 3백50톤(t) 상어급 잠수함으로 총 26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미 사흘전 침투해 정찰중이던 정찰조원을 데려가기 위해 해안 가까이 접근했다 좌초된 것으로 밝혀졌다.


잠수함이 좌초된 18일 오후 4시30분께 강릉시 강동면 산성우리 청학산 중턱에서 11명의 무장공비가 피살돼 있는 것이 발견된데 이어 10분뒤인 4시40분께 조타수 이광수(31)가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생포됐다.


소탕 작전에 나선 군(軍)은 이어 19일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 등지에서 7명을, 22일 칠성산에서 2명을, 28일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서 부함장을, 30일 왕산면 목계리에서 기관장을, 그리고 11월5일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정찰조원 2명을 각각 사살했다.


이로써 침투공비 26명 가운데 24명이 죽고, 1명이 생포됐으며, 1명은 행방불명 처리된 채로 작전개시 50여일 만에 사건은 막을 내렸다.


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이후 가장 많은 인원이 침투한 이 사건에서 우리측도 군인 11명과 민간인 4명이 희생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인적피해를 봤다.


또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의 주무대였던 강원도 지역은 통행금지와 출어제한, 입산금지 등으로 인해 2천억 원이 넘는 막대한 경제적 피해가 발생, 급기야 정부가 금융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당시 식량난에 허덕이던 북한을 돕기 위해 탈지분유가 지원되면서 남북화해무드가 무르익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남북관계를 급냉시켰으며 안이해진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에도 경종을 울렸다.


군내부에서는 이양호(78) 당시 국방부장관을 비롯해 군사령관 등 군수뇌부들이 대폭 경질됐다. 강원도 지역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어 지역경기가 불황의 늪을 헤맸으며, 정부가 중소기업과 요식업소를 위해 긴급 자금 지원을 했다.


당시 사건은 예비군들이 작전에 동원되면서 소집에 응하지 않았던 예비군 등 작전지시에 불응한 예비군 4천여명이 향토예비군 설치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기도 했다.

속초 잠수정사건과
96년 강릉 잠수함사건 비교

우리 영해에 침투한 북한 잠수함이 발각되기로는 당시가 두 번째였다. 북한은 심도가 깊어 잠수함 활동이 비교적 용이한 동해에 잠수함을 꾸준히 침투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운이 나빠 걸렸을 것”으로 추정할 정도로 동해상에서의 북한 잠수함 활동은 ‘공개된 비밀’이라고 말했다.


96년 잠수함 침투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남북관계는 대단히 경색돼 있었다. 95년 6월 27일 ‘쌀 주고 뺨 맞았다’는 씨 아펙스호(號) 인공기 게양사건의 여파로 북경(北京) 쌀회담이 결렬돼 꽁꽁 얼어 붙었던 남북관계는 특히 잠수함 침투사건 발생 직전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나진·선봉 현지에서 처음으로 개최됐던 투자포럼에 우리 당국의 불허로 남측 관계자들이 불참석, 남북관계는 더욱더 악화된 상태였다.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남북관계는 당시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화해와 협력, 평화공존의 큰 틀 속에서 고(故) 정주영(2001년 작고)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방북(訪北)을 승인했고 판문점 장성급 회담 개최도 성사시키는 등 구체적인 대북(對北)유화책을 전개해 당시와는 큰 차이점을 보였다.


특히 당시 강인덕(83) 통일부 장관은 정경분리 원칙에 대해 비록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과 유사한 도발사건이 발생할지라도 정경분리 원칙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요지로 발언할 정도로 전향적인 자세를 보인 적도 있었다.


강릉 잠수함 사건에 대해 우리 당국이 공식적으로 규정한 사건의 성격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었다.


강릉사건에 대한 북측 첫 반응은 사건 발생 나흘 뒤인 9월 22일 인민무력부 대변인의 담화였다. 이 담화는 “훈련용 소형 잠수함을 타고 정상훈련을 하던 중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 강릉 앞 해상에서 좌초해 무장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면서 “남측은 잠수함과 살아 있는 우리 군인들과 사망자들을 무조건 즉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해 사건발생 1백여일이 지난 96년 12월 29일 외교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유감을 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당시 대변인은 강릉해상에서의 잠수함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고 말하고 “다시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조선반도에서의 공고한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함께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 대변인의 담화가 뉴욕에서 10차에 걸쳐 진행된 미북(美北) 실무접촉이 종료되는 날 나왔다는 점도 시사적이었다. 즉 북한은 잠수함 침투사건 해결도 미국과의 직접대화에 의한 평화체제 구축에 결부시켰던 것이다.


속초 잠수정 사건은 7년만에 재개되는 유엔사와 북한의 장령급(장성급) 회담 개최 하루 전에 발생했다. 이미 전부터 이 회담을 ‘북미(北美) 장성급 회담’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북한은 속초 잠수정 사건을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통한 해결방법을 모색하려 했다.


강릉 사건과 속초 사건은 발생 당시의 주변 정황 등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북한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명분을 들고 나와 미국과 직접 해결을 모색한 점에 대해서는 상당한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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