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8년 북한군 게릴라들의 청와대기습 기도사건인 1.21 사태와 뒤이은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號) 납치사건은 북한 김일성의 새로운 군사적 모험주의에 의해 시도됐다는 분석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최근 비밀기록물에서 해제한 극비 보고서에서 제기됐다.


또 김일성은 통일을 위해 대규모 무력침공보다는 게릴라에 의한 남한 내 거점확보를 통한 무장공격이나 대중봉기 등을 통한 장기적 체제전복 전략을 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일성의 새로운 군사모험주의’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김일성이 미국과 직접적인 대규모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이 다른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정세판단에 따라 한국의 비무장지대(DMZ)에서 군사적인 도발과 1.21 무장게릴라 청와대 습격사건을 기도했다고 분석했다.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게릴라들을 남한에 침투시켜 청와대를 기습하도록 한 것은 무력 도발 시도에 대한 북한 내부의 일부 반발을 무마하면서 남한의 전 지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김일성의 열망 때문이었다고 이 보고서는 밝혔다.


평양의 방송들도 이 사건을 처음에는 남한 내 무장게릴라들의 출현으로 언급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북한이 DMZ에서 한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도발행위를 지속하면서 남한 정부관리 암살과 게릴라 거점확보, 남한공산당 조직 등 갖가지 임무를 부여한 게릴라를 침투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일성은 4.19 혁명과 5.16사태 등 1960년과 1961년 두 차례 걸쳐 남한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지만 호찌민 베트남 주석이 남부 베트남에서 정치·군사기구를 만들었던 것처럼 한국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공산당원을 훈련시키기를 분명히 원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1.21사태 직후에 북한이 저지른 1.23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은 김일성의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들에 근거한 정세판단의 결과물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객관적으로는 김일성은 당시 미국이 푸에블로호 납치에 따른 보복 조치로 핵 공격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고 재래식 보복 공격에서는 얼마든지 맞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


아울러 김일성은 소련 및 중국과의 방위조약 때문에 미국의 군사적인 행동이 억제되고 미국이 아시아에서 제2의 전쟁 개입을 꺼리고 있다는 믿음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관적으로는 김일성은 제국주의적인 미국에 도전함으로써 우방인 소련과 중국을 압도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고 푸에블로호를 납치함으로써 미국에 맞서는 북한의 대담함을 소련과 중국의 신중한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싶었다고 보고서는 진단했다. 이런 점에서 푸에블로호 납치와 DMZ에서 미군을 괴롭히는 것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을 반미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전략가라고 여겼다는 것.


김일성은 1968년 10월 작은 나라도 미국을 모든 전선에서 격퇴할 수 있다는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호찌민 주석이 주장했던 것과 비슷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美에 대규모 방위력증강 요청
치밀한 외교전… 1년간 숨쁘게 진행

당시 정부는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자 국군의 군사력 강화가 시급하다고 판단, 미국에 전력증강을 요청했다. 또 전력 증강을 위해 1년여 동안 치밀한 외교전을 펼쳐 미국 정부가 동맹국에 지원하는 특별군사원조금 5천만 달러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이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1969.4.26), 외무부장관이 주미 대사에게 보낸 ‘한국 방위력 증강의 기본계획’(1969.5.1.), ‘1970년도 미국의 대한군사원조 개관’ 등의 자료에서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4월26일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19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1969년 4월15일 동해상 미 해군 정찰기 격추사건 등 북한의 도발행위를 열거하면서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 대통령은 “적의 도발행위를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항구적인 대책이 수립될 것으로 믿는다”며 “항구적인 대책이란 이 지역에 있는 한·미 양국의 군사력을 적의 군사력보다 월등하게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적의 기도를 봉쇄하기 위해 최소한 북한의 군사력과 대등할 정도로 우리의 군사력을 증강해야 된다고 생각하여 군사 당무자들에게 한국군 군사력 증강 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적의 도발행위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미군(특히 공군력)을 한국에 증강하는 조치가 절대 필요하다”며 “강력한 미국 공군이 한국에 주둔하면 미 7함대가 한국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언제나 보복을 포함한 즉각적인 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원을 당부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작성된 한국의 방위력 증강 기본 계획은 미군 증원전력이 도착할 때까지의 기간(45일)에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전쟁물자 비축과 육·해·공군·해병대의 전력을 증강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1969년 6월7일 당시 임충식 국방장관이 레어드 미국 국방장관에게 보낸 ‘한국군 증강목표 계획’ 사본은 각 군별로 전력증강 계획을 상세히 담고 있다.


육군의 경우 ▲ 3개 전투사단을 10개로 늘리고 후방경비사단을 전투준비태세 사단으로 전환 ▲ UH-1H 헬기 3∼5개 중대 창설 ▲ 8인치 자주곡사포 또는 175㎜ 자주곡사포 5개 대대 창설 ▲ 기갑여단 증강 ▲방공자동화기기 4개 대대 창설 ▲ 군수지원부대 116개 창설 ▲ 향토예비군 소화기 130만정 확보 ▲ M-16 공장 설립 등이다.

해군은 당시 72척이던 주력함정을 205척으로 늘리고 진해부두를 확장하며 북한군의 해상침투를 저지하기 위해 13개 레이더기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공군은 전폭기 5개 대대를 증강하고 당시 5개에 불과한 작전기지를 3개 더 신설하며 F-86 기종을 F-4 등으로 교체하고 해상감시 초계 항공기(SP-2E)를 도입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해병대는 연대 규모의 예비병 훈련단 편성, CH-47 헬기 증대 창설을 계획했다.


한미는 서울에서 열린 국방각료회담에서 한국군 전력증강 문제를 구체적으로 토의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 같은 계획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특별군사원조금을 미국으로부터 지원받기 위해 상당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1969년 7월31일 로저스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맺은 각서는 한국군의 무기 및 장비의 증강과 현대화를 위해서는 정상적인 군사원조금 외에 특별군사원조금이 시급히 요청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69년 1월9일 대간첩 작전용 장비강화를 위한 특별원조 요청서를 미국에 제출하면서 시작된 치밀한 대미 외교전은 미국 의회가 1970년 1월28일 대한특별원조금으로 5천만 달러를 승인할 때까지 1년간 숨가쁘게 진행됐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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