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시장자유화 ‘신해통공(辛亥通共)’조치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요, 명재상이다. 세종의 치세를 이끈 황희 정승처럼 남인당을 결집하여 노론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정조(正祖, 재위:1777~1800) 개혁의 총사령탑 역할을 수행했다.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이다.

채제공은 1720년(숙종46) 4월 6일에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채응일(蔡膺一)과 연안 이씨 사이에서 충청도 홍주(홍성과 청양 일대)에서 태어났다. 15세에 향시에 급제했다.
채제공은 24세(1743, 영조19)에 과거에 합격해 국왕에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권지부정자(종9품)로 벼슬을 시작했다. 1753년(영조29) 34세에 호서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균역법의 시행을 조사하고 이의 폐단을 보고했다.

이후 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이천부사 등을 거쳐 1758년(영조34) 39세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사도세자(思悼世子) 폐위의 비망기(備忘記, 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가 내려지자, 채제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철회시켰다. 이후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762년(영조38)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이 해 윤5월에 사도세자가 폐위되고 사사되었다.

이처럼 30대 후반부터 50대 중반까지 채제공은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사관은 이 무렵 “다른 신하들은 윤허 받지 못한 일도 그가 나서면 허락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평가했다.

영조는 정조에게 “참으로 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채제공에 대해 “영의정 채제공과 나는 공적으로는 비록 군신관계이나 사적으로는 부자관계와 같다”며 한없는 존경심을 표했다. 채제공이 정조보다 33세 연상이니, 두 사람은 오륜(五倫)의 ‘군신유의(君臣有義)-부자유친(父子有親)’의 ‘의(義)와 친(親)’을 함께 느끼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이처럼 채제공은 79세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55년의 긴 세월 동안 영조와 정조라는 두 걸출한 국왕을 보좌하여 개혁정책을 성공시켰고, 정조의 정치적 이상인 탕평정치를 도왔다. 그는 민생정치와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기초하여 경제회생에 총력을 기울인 조선 최고의 경제정책가였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1776년 영조의 승하로 26세로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었고 자신도 당쟁의 폐해를 절감했기 때문에 ‘탕평(蕩平) 인사’를 활용했다.

정조는 채제공·정약용·이가환·안정복 등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된 노론 벽파의 당수인 김종수·심환지 등도 측근으로 두었다. 이처럼 정조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은 미래지향적 정치를 펼친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780년(정조4) 소론계 서명선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채제공은 노론의 집중공격을 받아 이후 8년 간 서울근교 명덕산(수락산)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8년(정조12), 정조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 개혁정치를 펼치기 위해 69세의 채제공을 우의정에 제수했다. 남인 출신의 정승은 80여년 만이었다. 이 때 체제공은 ▲황극(皇極, 편파가 없는 곧고 바른 치국의 도리)을 세울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백성의 어려움을 돌볼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6조 진언’을 상소했다.

1790년(정조14), 71세의 채제공은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때 영의정과 우의정이 공석인 독상(獨相)으로서 3년간 재직하며 개혁과제를 추진했다. 이것은 100년 동안 없던 일이었다.

채제공의 가장 큰 업적은 조선 최초의 시장자유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 할 수 있다. 1791년(정조15) 조선경제사에 한 획을 긋는 발표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시전 상인들이 사상인(私商人)의 상업 활동을 단속, 금지할 수 있도록 허용한 금난전권(禁亂廛權)에 대해 육의전을 제외하고 모두 혁파한다.”

채제공은 육의전과 시전상인이 상권을 독점하기 위해 조정과 결탁하여 난전(亂廛)을 금지할 수 있었던 ‘금난전권’은 잘못된 것이며, 조선의 백성들은 누구나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해통공’은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였다. 이 정책은 조선시대 최고의 경제개혁이었다. 이로 인해 자유로운 상업활동과 통상을 보장하여 조선 후기의 경제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됐다. 또한 신해통공은 조선 집권당파의 음성적 뇌물부패 고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조치였다.

1793년(정조17) 5월, 채제공은 74세 고령의 나이에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숙종 이후 남인이 공식적으로 영의정에 오른 첫 번째 사례였다. 정조는 이듬해 정월 채제공을 화성 책임자로 복직시켰다.

수원성은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힐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는 점이 자랑이다. 수원성은 채제공이 성역의 총 지휘를 맡고,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감독했다. 정조-채제공-정약용이 ‘드림팀’이 되어 화성 축조를 성공시킨 것이다.

1799년 1월 18일. 채제공은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채제공과 정조 사후 이 땅에는 불행하게도 현명한 왕과 어진 재상이 출현하지 않았다. 이후 조선은 삼정(三政)의 문란, 세도정치 등 국가행정과 공공성이 붕괴되면서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마치 그리스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한 뒤 그를 필적할 만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아테네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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