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는 중이다. 이번 겨울은 상당히 추웠던 만큼 가는 겨울이 유난히 아쉬웠다. 그런 아쉬움을 떠나보내는 장소가 필요했다. 북적이지 않은 곳, 그리고 극도의 한적함, 마지막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 문득 바다가 떠올랐다.


양양(襄陽)은 강원도 동쪽을 대표하는 두 도시인 강릉과 속초 사이에 있다. 동해에 해맞이 명소가 많지만 ‘해가 뜨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일출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오랜 고장이다.

양양을 감싸고 있는 백두대간은 설악에서 크게 한번 기지개를 켜고 점봉산을 거쳐 오대산으로 이어진다.

북녘에서부터 먼 길을 이어온 산세는 동쪽으로 자락을 드리우면서 양양에 내려앉고 동해와 만난다. 겨울 막바지 동해의 파도는 그런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듯 다소곳하고 고즈넉했다.

미시령엔 아직도 겨울의 흔적인 눈이 남아 있었다. 강원도 동쪽 지역은 한반도에서 겨울이 마지막으로 머물고 떠나는 곳이기도 하다.

속초 시내로 들어가는 언덕을 넘자 멀리 바다가 보였다. 탄성이 무의식중에 흘러나왔고 듬성듬성 바다를 향해 서있는 이들도 같은 마음을 담아내는 듯 좀처럼 자리를 떠나질 못했다.

속초 시외버스 터미널에는 바닷바람을 맞기도 전에 아직 떠나지 못한 겨울바람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약간의 비린내도 조금씩 떠다녔지만 어쩐지 묘한 안도감이 일렁였다. 속초에서 다시 양양 행 버스를 탔다. 승객은 오직 나뿐. 양양. 나는 이곳에서 떠나는 겨울을 보낼 것이다.

양양 5일장

도착한 날은 마침 양양 5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길거리 어느 곳 이든 사람들은 저마다 시장바구니와 보따리를 들고 다녔다.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양양 재래시장에 들어섰다.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양양 5일장은 영동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커 저 멀리 정선과 태백에서도 물건을 팔러 올 정도라고 한다.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일제 강점기에 저항해 만세 운동이 시작된 곳이라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월 숫자 4와 9가 들어가는 날 장이 선다고 한다. 시장 안은 북적거렸다.

이곳에 온 이유대로라면 북적이는 곳은 피해야 마땅했으나 이곳의 북적거림은 도심의 것과는 다른 것이기에 발걸음이 향할 수밖에 없었다.

더덕과 버섯 그리고 다시마와 멍게 젓갈을 샀다. 앞으로 들를 곳들이 있었기에 가방의 무게가 신경 쓰였으나 그들이 내민 수수하고 담백한 미소는 그런 세속적인 질량에 비할 수 없었다.

겨울 양양은 생선인 도치가 제철이라 곳곳에 도치가 즐비했고 송이의 고장답게 자연송이도 많이 보였다.

따뜻한 인심과 시장의 푸근한 열기로 방금 전에 느꼈던 추위의 온도가 어느 정도 가시는 듯 했다. 추위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역시 사람들의 온기뿐. 양양시장은 과도하게 친절하지 않고 딱 그만큼만 보여 주는 양양의 속마음 같은 곳이다.

휴휴암

다시 터미널로 돌아와 휴휴암으로 가기로 했다. 교통편이 마땅치 않은 것 같아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을 하고 있자니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한 분이 정류장에 서 있는 버스가 휴휴암까지 간다며 안내해줬다.

조금 전 터미널 창구에서는 휴휴암을 간다고 하니 밖에 서 있는 버스에 직접 물어보라며 퉁명스럽게 대했기에 할머니의 안내는 더욱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휴휴암은 강릉과의 경계 지점에 있는 곳이라 거의 강릉까지 내려가야 한다. 버스는 삼십 분을 달려 휴휴암에 몇몇의 승객들을 내려놓았다.

입구로 들어서자 이름에서 유추되는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흉물스러운 철제 펜스가 가로 막혀 있었다. 한 대기업이 부지 문제로 휴휴암과 마찰을 일으켰고 영역 표시 때문에 경내에 펜스가 쳐진 것이란다. 씁쓸함이 감춰지지 않았다.

휴휴암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다. 이천년이 시작되기 바로 전 바닷가에 누운 부처님 형상의 바위가 발견되면서 불자들의 명소로 부상했고 후에 바다 바로 앞에 암자가 지어지면서 많은 불자들이 찾는 관음도량이 됐다.

바다를 등지고 있는 거대한 지혜관세음보살입상은 휴휴암을 찾는 불자들이 반드시 찾는 대상이며 절절한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입상 뒤로 펼쳐진 동해는 이제 막바지 겨울을 파도에 쓸려 보내는 것처럼 거칠게 반응했다. 바다가 멀고도 먼 곳에서부터 맹렬하게 와서 바위에 부딪혀갈 때, 그 거대한 물이 한낮 파도의 포말로 부서져 갈 때 사람들은 그 어떤 것보다 허무함을 느낀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바로 휴휴암이다.

수산항

하루에 세 번 정도밖에 없다는 버스를 기다리기에는 바람이 차가웠다.

설악산의 줄기와 동해의 남대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수산항은 작년 겨울, 서해의 격포항과 남해의 미조항 그리고 제주의 김녕항과 함께 ‘아름다운 어항’ 공모 사업에 선정이 됐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요트가 정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항으로 국가 대표팀의 훈련지로도 유명하다.


양양을 대표하며 강릉 심곡항, 삼척 초곡항과 더불어 강원도 3대 미항으로 인정받고 있는 남애항이 더 유명세를 치르지만 이번 여정은 겨울을 조용히 마감하러 가는 길이기에 조금은 더 한적하다는 수산항으로 향했다.

막 항구에 도착한 배에선 부부가 그물을 걷고 있었다. 몇 십년간 같은 배를 타고 부부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겠지만 그물을 당기는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모습을 한참 구경하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자 남편이 호탕하게 찍어도 좋다며 자세까지 잡고 나섰다. 부인은 예쁘지 않다면서 수줍은 미소로 손사래를 쳤다. 수산항의 빼어난 경관이 그들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왔고, 그들로 각인된 항 내음은 여정의 마지막까지 좀처럼 뇌리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낙산사

낙산사는 신라 시대의 승려였던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의 진신사리를 모셔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관동팔경 중 한 곳이다. 2005년 고성과 양양 지역을 뒤덮은 산불로 일순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렸지만 당시 기적적으로 화마를 입지 않은 16m 높이의 해수관음상은 아직도 이 영험한 낙산사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 머물 때 세운 의상대와 바닷길 절벽에 위치한 홍련암, 그리고 역시 불길을 피했던 보타전과 예전에 강원도를 구성했던 26개 고을에서 돌을 하나씩 내놓아 석축을 쌓았다는 낙산사 입구인 홍예문 등이 양양을 대표하는 명찰인 낙산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낙산사는 평일 오후인 탓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스님들은 뒷짐을 지고 경내를 걸었고 해수관음상 밑에는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부인이 차디찬 바닥에 몸을 굽히고 무릎을 꿇어 기도를 했다. 어머니의 기도, 나는 그 간절한 기도가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낙산 해수욕장

낙산에서 방향을 아래로 틀어 낙산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경포대 해수욕장과 더불어 영동 지역을 대표하는 낙산 해수욕장은 4km가 넘는 곱고 너른 백사장을 지니고 있다. 거친 설 악과 이웃하지만 주위에 해송이 둘러쳐져 있기도 해 푸근하고 아늑한 인상을 준다.

설악에서 흘러내리는 남대천이 하구에 큰 호수를 이루고 있어 담수가 풍부하며 수심은 70m 앞 바다까지 1.5m 내외이므로 해수욕장으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추운 날씨임에도 몇몇의 사람들이 겨울 바다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도 겨울을 보내는 시간을 따로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도는 급하게 밀려오지 않았다.

조용히 밀려왔다 다시 그만큼의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바다 냄새와 바람 냄새들이 약간의 비린내와 뒤섞여 다가왔다. 아마 내일 새벽에는 불같은 태양이 다시 이 낙산 해변을 붉게 물들여 조용한 이곳을 깨울 것이다.

사각거리는 모래 소리를 벗삼아 바다를 등지고 해변을 걸어 나왔다. 낙산 바다는 한 적한 곳에서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자 갈망했던 내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곳에서 이번 겨울과 지난해의 기억들 그리 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한 마지막 환송과 새로운 인사를 했다. 마지막 겨울바람이 뺨을 스친다.

 

[여행 Tip] 양양 맛집

수산항 성게젓 비빔밥, 해녀횟집

   
 
원래 이 집의 대표 메뉴는 자연산 홍합인 섭으로 끓여 내는 섭국이다. 올리브TV ‘한식대첩’에 강원도 대표로 나올 정도로 지역에서 알아주는 손맛을 지닌 곳으로 수산항 유일 현역 해녀가 운영한다. 섭국이 알려진 메뉴지만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성게젓 비빔밥도 베스트로 손꼽힌다. 성게알을 젓으로 만들어 올려주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 곳에서만 접할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한다. 담백하면서도 정갈한, 재료 본연의 색이 고스란히 담긴 맛이다. 또한 반찬으로 멍게젓과 강원도 향토 음식이자 해조류인 지누아리가 나와 반찬 하나로도 매우 값진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수산리 55번지(전화 033-672-1800)

째복 요리, 수산항물회

이름도 생소한 째복은 동해안의 바닥에서 나는, 가장 무늬가 아름답다는 민들조개이다. 조개의 모양이나 색상 등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을 정도 로 생태학적으로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국물 맛이 깊어 명주, 홍합, 가리비에 앞선다는 째복. 끓이면 조개 중 유일하게 사골 국물처럼 뽀얀 국물이 나온다. 수산항물회의 주인장은 직접 째복을 길어 올리는 어부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째복만을 위주로 한 음식을 선보인다. 물회, 무침, 칼국수 그리고 국까지. 째복국은 한 숟갈에서 벌써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맛이 강렬하다. 입 속에서 씹히는 쫄깃한 식감 그리고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국물은 특히 해장에 완벽하다.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수산리 80-2(전화 033-671-0750)

<프리랜서 이곤 기자>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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