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UAE)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대한항공(KAL) 858편 보잉 707기.


아부다비 기착 후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방콕을 향해 다시 비행하던 이 여객기는 29일 오후 2시께 미얀마 벵골만 상공에서의 무선 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당시 외무부(현 외교부)에는 즉각 초비상이 걸렸다.


이날 저녁 8시 40분께 제1차관보를 단장으로 한 정부실무대책본부가 구성됐고 밤 9시 55분 외무부 대변인은 ‘KAL기 실종’을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다.


당시는 858편은 이미 공중폭파된 후였으나 사건 발생 15일 만에 비행 중 폭발에 의한 추락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에 외무부는 실종 사실만을 발표한 것이다.


외무부는 공식 발표와 함께 전 해외공관에 비상근무령을 내리고 특이사항은 모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인 30일 오전 7시 30분 홍순영(2014년 작고) 외무부 2차관보와 동남아과장, 특수수사 요원 등으로 구성된 정부조사단이 여객기 실종지 인근인 태국 방콕으로 급파됐다.


당시 현지 출장을 떠난 동남아과장을 대신해 본부의 실무 책임은 장철균(전 스위스대사) 동남아과 과장대리가 맡게 됐다. 외무부 차원에서 해외공관에 비상을 걸고 특이사항을 모두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그날 늦도록 특별한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인 12월 1일 0시20분.


주아랍에미리트(UAE) 대사관으로부터 전문 하나가 급하게 타전된 뒤 전문을 보냈다는 확인전화가 걸려 왔다. 밤샘 근무를 하던 당시 장 과장대리는 전문을 확인하는 순간 ‘공작폭파’란 사실을 직감했다. 주 UAE 대사관이 보낸 전문은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편의 승객 중 15명이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는데 그중 일본인 마유미 등의 신원이 의심스러우니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장 전 대사는 지난 2012년 10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작(工作)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했다”면서 “외교관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의문의 여지를 가질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에게는 1분 1초가 급했다.


머릿속에는 이들이 자취를 감춘다면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질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즉시 도쿄에 있는 주일 한국대사관 정무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문을 해독하는 외신관과 함께 대사관에 바로 나가 전문을 해독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인 2명의 신원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주일 대사관이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무과장은 밤늦은 시간 외신관을 깨워 전문을 확인한 뒤 경시청을 직접 찾아갔다.


마침 그때 일본 경시청은 중동에서 일본 좌익 테러조직인 적군파(1969년 2개의 극좌파가 연합하여 이루어진 단체)가 준동(蠢動)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비상 야근을 하고 있었다. 경시청은 의심스러운 일본인 2명의 여권을 조회한 결과 가짜 여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들이 적군파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장 전 대사가 주일대사관 정무과장의 전화보고를 받은 시각은 12월 1일 새벽 3시 30분께였다. 업무 지시를 받고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기까지 3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실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 전 대사는 전문을 칠 여유도 없이 즉시 주바레인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행적이 의심스러운 하치야 신이치(蜂谷眞一·김승일), 하치야 마유미(蜂谷眞由美·김현희) 등 2명은 이미 아부다비에서 바레인으로 이동해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일단 이들이 묵고 있던 호텔로 찾아가 보라고 했다.


또 대사관에 우선 2명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지시하면서 현지 일본대사관과 긴밀히 협조할 것을 당부했다. 위조여권이긴 했지만 어쨌든 일본 여권 소지자였기 때문이다.


이들 일행에 수배조치를 내린 현지 일본대사관 측과 협조해 “이들의 출국을 저지하라”는 지시도 함께 내려졌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장 전 대사는 아침 시간 바레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주바레인 대사대리가 직접 마유미 일행이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간 상황을 전화로 보고해 왔다. 일본인으로 가장한 김승일(하치야 신이치)과 필담을 나눴는데 그가 일본어를 쓰면서도 말이 서툴렀고 필담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서 하나를 잡았다는 보고였다.


‘참 진(眞)’자의 경우 우리가 쓰는 글자와 일본에서 통용되는 약어가 달랐는데 김승일이 우리식 한자를 썼다는 것이다. 이런 보고를 받은 순간 장 전 대사는 이들이 진범이란 사실을 육감적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이후 주바레인 대사관의 마유미 일행 동태 감시는 계속됐다. 대사관은 마유미 일행이 호텔을 떠날 때까지 탐문 사항을 수시로 보고해 왔다.


결국 마유미 일행은 1일 오후(한국시간) 바레인 당국에 체포됐다. 비행기 실종 이후 이틀만이었다. 이들은 일본 위조여권을 이용해 로마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으로 달아나려다가 현지공항 검색대에서 경찰에 적발됐다.


주바레인 대사관과 바레인 공항 경찰 당국, 일본 측의 긴밀한 협조가 없었다면 자칫 놓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김승일은 체포 직전 독약이 든 앰풀을 깨물어 자살했고 바로 옆의 ‘마유미(김현희)’도 담배에 든 앰풀을 깨물려고 시도하다가 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조사결과 부녀로 가장한 김승일-김현희 일행은 바그다드에서 KAL 858편에 탑승, 기내에 시한장치를 한 ‘라디오 폭탄’을 두고 아부다비에서 내린 뒤 곧바로 바레인으로 도주해 은신한 것으로 드러났다. 장 전 대사는 KAL기 실종 사실이 알려진 뒤 이들이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되기까지 한잠도 못 잔 채 48시간을 꼬박 깨어 있었다.


장 전 대사는 숨 막혔던 이틀의 순간순간을 25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 상황이 하나라도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자칫 김현희 일행을 놓쳐 사건이 미궁속으로 빠졌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한다.


김현희 일행이 아부다비에서 육로로 도주했거나, 바레인에서 호텔에 머물지 않고 바로 제3국으로 떠났거나, 일본 경시청이 비상야근을 하지 않았거나, 일본과 바레인 현지 우리 대사관 직원들이 긴밀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미제사건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00년대 들어와 KAL기 폭파사건이 조작됐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 것과 관련, “조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장 전 대사는 “조작이 아니라는 100% 확신할 수밖에 없는 여러 증거가 있다”면서 “일본, 바레인 등 여러 나라가 관련이 있는 사건을 안기부가 조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김현희가 진범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역사의 진실이 왜곡된다면 앞장서서 진실을 밝혀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분단의 비극이자 민족 전체의 비극인 KAL기 폭파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제2, 제3의 유사사건을 방지한다는 측면에서라도 통일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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