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버마) 양곤 국제공항에서 남쪽을 향해 20분 정도 달리면 인야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인야레이크 호텔에 이른다. 33년 전인 1983108일 저녁 이곳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수행단 일행을 맞이해 한국식 뷔페가 차려졌다. 수행단 일원인 당시 이범석 외무부 장관과 김동휘 상공부 장관, 버마(당시 국명현 미얀마)주재 한국대사관의 이계철 대사와 차석인 송영식 참사관 등 4명은 한자리에 앉았다.

서로들 구면이었던 터라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들은 전 대통령이 우리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비동맹 중립국인 버마를 방문함에 따라 서방 일변도였던 우리 외교의 새 지평이 열리게 됐다고 자축했다.
 
당시 송 참사관은 그날 저녁식사가 세 사람과 함께 하는 마지막 만찬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버마 순방 뒤늦게 결정
경제협력 잠재성 때문
 
19835월 버마 주재 우리 대사관은 서울로부터 대통령이 108일 도착해 11일 떠나는 일정으로 국빈 영접 가능성을 극비리에 타전하라는 갑작스러운 훈령을 받는다.
 
예상 외로 흔쾌히 정상 외교에 응한 버마 정부와의 조율을 거쳐 암호명 국화아래 대통령 방문을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인도와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방문을 결정한 상태에서 버마가 막판에 추가된 배경을 두고 다양한 설이 있었지만 수산자원과 귀금속 등이 풍부한 버마와의 경제협력 가능성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라는 게 송영식 전 차관보의 설명이었다.
 
송 전 차관보는 지난 2013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해 5월 청와대를 다녀온 이범석 외무장관이 공로명 당시 차관보에게 버마가 경제협력 잠재성이 크기 때문에 순방국에 추가됐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공 전 장관으로부터 최근 들었다고 밝혔다.
 
경제협력이라는 실리 외에도 대통령이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주창하던 버마를 방문하는 것은 충분한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
 
당시 이계철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관계자들은 대통령 순방을 기쁘게 준비하면서도 국무총리는 고사하고 외무부 장관도 다녀간 적이 없는 버마에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내심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1965년 김일성이 버마를 다녀간 데 이어 1977년에는 최고 권력자인 네윈 버마 당 의장이 평양을 방문했고 1983년만 해도 이종옥 북한 총리 등이 버마를 찾을 정도로 버마·북한 관계가 실질적으로 돈독하다는 점도 그 이유였다.
 
더군다나 버마는 권력 암투 속에서 틴우 정보부장과 휘하 간부들이 갑자기 제거되면서 정보당국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양국의 경호 협의도 대사관을 경유해 이뤄질 정도로 원활치 못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 방문을 코앞에 둔 시점에 북한 국적 화물선인 동건애국호가 갑자기 양곤항에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송 전 차관보는 안기부가 방문 취소를 건의했으나 양국이 공개 발표한 상황이라 예정대로 방문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지금 생각해보면 방문을 취소했어야 하는 아주 엄청난 사안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다음날 아침 1020, 수행단은 어떤 일이 닥칠지 꿈에도 모른 채 버마 독립투쟁 영웅인 아웅산 묘소에 차례차례 도착했다. 이 시각 대통령 일행은 수행 시각을 착각한 버마 외무장관 때문에 예정보다 3, 4분 지체한 시각에 출발해 묘소로 오고 있었다.
 
대통령 도착을 기다리던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단상 아래로 송 참사관을 부르더니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잠시 갖고 있다가 달라며 자신의 업무일지를 건넸다.
 
김 수석의 업무일지를 왼손에 든 채 대통령 차량이 도착할 오른쪽 입구만을 응시하던 송 참사관은 별안간 왼편에서 예포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고 묘소 지붕은 폭삭 내려앉은 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대사, 김재익 경제수석 등 우리 정부 각료와 언론인, 경호원 등 17명이 묘소 천장에 설치된 폭탄에 목숨을 잃은 아웅산 테러는 그렇게 발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슬픔과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테러 배후를 찾아내고 사건을 수습해야만 했다. 이 대사를 잃은 송 참사관도 마찬가지였다.
 
버마 움직일 수 없는
증거요구
자백 위해 미인계 이용
 
원격조종장치를 이용한 폭탄 테러를 저지른 뒤 양곤항으로 도망하던 범인 셋 중 1명은 사살됐고 2명은 체포됐다.
 
수류탄이 터질 경우의 위험을 감수하고서 몸을 던진 버마 군인들 덕분에 생포가 가능했다.
 
버마 정부는 범인들이 체포된 직후 국제적인 이목이 쏠린 이번 사건을 독자적으로 조사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했다.
 
우리 정부의 공동 수사 제안도 거절하고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범인 통역을 위해서 한국인이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자국인들을 불러들이고 한국어 사전까지 구해갈 정도였다.
 
버마 정부 인사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찾아오는 송 참사관에게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와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버마 정부는 체포한 2명이 코리안이고 범인이라고 확인했다는 내용의 중간발표를 1017일 했으나 북한인인지 한국인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시 피 마르는 나날이 계속됐다. 우리 정부 관계자 4명은 1025일에야 육군 병원에 입원 중이던 범인 2명을 처음으로 면담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비동맹 중립외교를 표방하는 국가들의 외교사절도 함께 참석했다.
 
침묵으로 일관한 진범과는 달리 다른 1명은 내 이름은 강민철이고 서울 돈암동 출신이며 성북국민학교를 다녔다며 자신은 남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보고를 받은 우리 정부는 즉각 신원조회에 들어갔으나 강민철의 주장과 맞아떨어지는 조건의 사람은 1명도 없었다. 그 사이 범인들이 묵었던 북한 참사관의 집에서 이들이 먹다 남긴 맥주 깡통들이 발견됐다. 결정적인 증거는 범인들이 소지하고 있던 브라우닝 권총이었다. 권총 일련번호 조회를 인터폴에 요청한 결과 북한이 1975년 벨기에에서 수입한 권총 100정 중 하나라는 전문이 도착했다.
 
북한의 소행임을 알리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이렇게 속속 발견됐지만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우리 정부는 당시 중국이 버마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가장 크게 우려했다.
 
결국 사건 발생 약 한 달 만인 114일 송 참사관은 버마 외무차관으로부터 범인들은 북한 정부 지령에 따라 행동한 북한인이라는 완전한 증거를 발견했다는 이야기와 국가 승인 취소를 포함한 북한 응징조치를 통보받았다.
 
그가 북한대사관 굴뚝의 시커먼 연기를 보고 강제퇴거에 대비해 문서를 태운다는 직감이 들어 정부에 보고한 지 이틀이 지나서였다. 범인 중 진모는 이듬해 교수형에 처해졌고 강민철은 2008년 미얀마 감옥에서 25년 복역한 끝에 숨졌다.
 
송 전 차관보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버마 정부를 우선 믿었고, 압박하기보다는 버마 측 요구에 최대한 협조했다신뢰가 가장 중요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우리는 사전 분위기 조성차 취재진과 공연단 등을 대거 보내 떠들썩하게 행사를 준비했다면서 폐쇄적 성향의 버마 실정에 맞게 조용히 극비리에 준비했다면 북한의 테러 실행 준비 기간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동건애국호가 올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