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봄을 목전에 둔 아테네에는 뜻밖의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북아프리카를 넘어온 시로코 바람이 따뜻하게 공기를 감싸 안을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옷깃을 여미며 비행기 트랩에서 내렸다.

비수기인 탓인지 공항 내부에 관광객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쩌면 북적이지 않는 겨울이 오히려 그리스를 자세히 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별다른 긴장감 없는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는 동안 진눈깨비는 눈으로 바뀌어 나를 더 당황시켰다.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리스의 그림은 분명히 이 모습이 아니었다.

대기 중엔 그리스의 냄새라기보다는 그저 물 찌꺼기 같은 냄새만이 떠돌았다. 거리며 건물들 모두 잿빛 실루엣으로 우중충하게 눈을 맞고 있었고 사람들은 외투 깃을 더 세우고 미끈거리는 길을 조심스럽게 다니고 있었다. 거리의 올리브 나무들은 뜻밖의 눈을 뒤집어쓰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남극 빙하를 보기 위한 전초기지인 아르헨티나 최남단, 세상의 마지막 도시로 불리는 우슈아이아라는 곳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 와서 처량맞게 비를 맞으며 빙하를 보다니, 난 참 운이 없는 사람이네’와 ‘이곳에서 비를 맞으며 빙하를 보다니 이건 대단한 행운이야.’ 눈이 오는 그리스. 그래, 어쩌면 나는 축복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눈의 기억, 리까비도스 언덕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박물관이었다. 국립박물관은 원래 한 나라의 여행을 마감하며 가장 나중에 들르는 포인트였지만 거세지는 눈발은 나의 발걸음을 실내로 향하게 했다. 아테네의 우범 지대라고 알려진 오모니아 역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박물관이 나온다.

사람들은 바쁜 와중에도 동양의 여행자에게 친절하게 박물관의 위치를 가르쳐주곤 했지만 정작 박물관에 도착해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숙소에서 준 정보로는 저녁 여덟 시까지 오픈이었지만 정작 그런 날은 월요일뿐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두 명의 여성도 눈에 젖은 지도를 들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아쉬웠지만 다시 숙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테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빛의 언덕’이라는 뜻의 리까비도스 언덕으로 가기로 했다.

아테네의 중심지인 신타그마 광장으로 가서 정상까지 걸어서 오르기로 했다. 어디선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지만 오르는 동안 커다란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한 명만을 만났을 정도로 거리에는 행인이 없었기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날씨는 안 좋았고 시간도 지난 상태라 사위는 빠르게 어두워져 갔다. 정상에는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나는 거대한 눈보라를 피해 들어온 것처럼 외투에 묻은 눈들을 털어내고 들어갔다.

구석에서는 조용하게 고해성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어수선한 바깥과는 다른 예배당의 모습은 무언가 세상과는 선을 그은 듯 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잠시 후 고해소에서 나온 신부는 신자의 어깨를 다독이며 무언가 위로의 말을 다시 전했다. 따뜻함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온기가 보태어졌을 때 비로소 구체화된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다시 나왔다.

저 멀리 파르테논 신전에 불이 들어오고 시내 곳곳에 가로등이 켜졌다. 삼각대를 펼치며 사진을 찍고 있는 미카를 만났다.

스물두 살의 청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쪽의 섬에서 파르테논의 야경을 찍으러 아테네로 왔다고 했다. 미카는 자신이 사는 동안은 이렇게 눈이 온 적이 없다고 했다.

22년 만의 눈. 나는 그런 아테네를 내리는 눈 속에 그리고 또 내 눈 속에 담았다. 아크로폴리스 그리고 파르테논 신전.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국립고고학박물관

이튿날도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박물관이었다. 눈은 그칠 기미 없이 더욱 거세졌다. 1829년 설립됐으며 세계 10대 박물관에 꼽히는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헬레니즘, 비잔틴 시대에 이르는 수많은 유물과 조각품 및 미술품을 보관하고 있는 그리스 여행의 필수 코스인 곳이다.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작품들은 100% 진품이라고 하며 내부는 시대별, 항목별로 56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있다. 내가 이곳에 머물던 서너 시간 동안 느꼈던 감정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몽환이었다.

알고 있던 신들이 조각품으로 형상화돼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제까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경이롭고 또 약간 불가사의한 꿈을 꾸는 그런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콜렉션들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세계에서 몇 곳이나 될까.

창을 던지려고 하는 포세이돈상과 말을 타는 소년 그리고 아가멤논의 황금이나 프레스코 벽화 같은 작품들은 너무나 역동적이고 섬세해 내 입에서는 찬탄이나 전율 같은, 살면서 드물게 느끼는 감정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나는 이런 동일한 감정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멕시코의 인류사 박물관 그리고 태국의 반치앙 국립박물관에서 느꼈던 적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사소한 접시나 항아리 같은 생활도구에도 극도의 예술혼을 불어넣어 밋밋하고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들은 하나도 없었다. 박물관에 있던 몇 시간동안 나는 그리스의 시간에 그야말로 잠겨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날이 거짓말처럼 맑아져 있었다. 눈에도 소나기라는 단어가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파랗게 열렸고 구름은 하얗게 스며들었다. 아테네의 하늘, 그러니까 지중해식 바다와 맞닿은 그리스식 하늘. 어쩌면 내가 바랐던 것은 이런 풍경일지도 모른다.

신타그마 광장, 플라카 지구

‘헌법광장’이라는 뜻의 신타그마 광장은 1843년 최초의 헌법이 공포된 장소로 아테네 여행 중에 가장 많이 마주치게 되는 곳이다.

계단 뒤쪽으로 그리스 국회의사당이 있고 미트로폴레오스 거리를 따라 고급 호텔, 레스토랑들과 쇼핑 거리로 이어져 아테네의 신시가지로 인식된다.

▲ 산티그마 광장은 아테네 여행의 출발점이다
▲ 모나스트라키 광장의 그리스 비보이들
이곳은 아테네의 구시가지로 불리는 모나스트라키 광장까지 바로 이어지고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그리고 제우스 신전과 아테네 국립공원까지 큰 동선을 따라 모두 멀지 않은 거리에 있기에 결국 이 주변이 아테네 여행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 그리스의 군밤은 하루키 소설‘먼 북소리’에도 나온다
먼저 아테네의 남대문 시장이라고 불리는 플라카 지구 쪽으로 갔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그리스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흥정을 하고 또 때로는 무심하게 돌아서며 한바탕 웃고 또 처음처럼 다시 시작한다.

시장에서 배우는 것은 거대한 그리고 눈물겹게 중요한 일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치는 데 있는 것 같다.

따베르나(그리스의 일반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기로스를 파는 따베르나에는 적당히 차려입은 신사 두 명이 단순하게 술과 물만 시켜 그다지 느리지 않은 속도로 술을 털어 넣었다. 이름은 우조, 그리스의 국민술이라는 그 독한 우조를 나는 오늘 밤 분명히 마실 것 같다.

매 시간마다 펼쳐진다는 근위병 교대식을 보러 갔다. 교대식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독특한 동작과 특이한 옷차림새는 보통의 근엄한 교대식들과는 조금 달랐다.

군인의 절도나 용맹과는 조금 다른, 나라를 지키는 사람으로서 예절과 규범 등에 초점이 맞춰진 교대식이었다.

건물 외부 벽면에는 여러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리스 독립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서 사망한 그리스의 무명용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글자는 ‘KOPEA’였다. 그리스 알파벳 철자에서는 ‘R’를 ‘P’로 쓴다고 하니 아마 한국전쟁 때 참전한 용사를 기리는 비문이었을 게다.

▲ 아테네의 명물, 왕궁교대식
아크로폴리스는 오늘 안 보기로 했다. 아크로폴리스를 볼 때는 최대한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하게 ‘감상’하는 것이라는 마음뿐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이미 아크로폴리스를 박물관과 같이 묶을 수 없다는 결론이 섰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같은날 보는 것과 같았다. 영원의 시간을 단 하루에 묶는 것, 그것은 분명히 실례다.
<다음 호에 계속>

<프리랜서 이곤 기자>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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