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시스>

[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쌀농사를 짓는 프라팟폰 룽사티엔(48·여)은 태국 시골의 마을회관에 차려진 농민교실에 이웃 농민 49명과 함께 출석해 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가 태국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흔들어 놓는다. 프라팟폰은 지난 2월 실로 오랜만에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태국 정부에서 예산을 투입해 전국 각지의 농촌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이 농민교실에서는 동남아시아 경제 상황에서부터 부기(簿記)와 양계(養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목을 가르친다. 하지만 농민교실의 주목적은 농민들이 쌀농사를 덜 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콩 같은 대체작물 경작 방법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태국이 쌀 국제시세 폭락, 쌓여가는 쌀 재고, 쌀농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20년래 최악의 가뭄으로 고전하고 있다. 급기야 태국 정부가 농민교실을 개설한 배경이다.

쌀 수출 1위 태국
정부 고민 깊어

태국 정부가 대체작물 경작을 부르짖어 온 지는 10년이나 됐다. 그랬는데 이제 쌀값 폭락도 모자라 가뭄으로 인한 물 부족 사태까지 덮쳤다. 그래서 이제 “제발 쌀농사 좀 덜 지읍시다”고 농민들을 설득하는 정부의 노력은 부쩍 강화되고 있다. 차이낫 성(省) 상카부리 지구의 마을 농민교실 벽에는 부미볼 아둔야뎃 국왕 사진 옆에 “물을 지혜롭게 사용하자”는 군사정부의 구호가 붙어 있다. 인근의 농수로는 주변 농지와 마찬가지로 바싹 말라 있다. 아피삭 탄티보라웡 태국 재무장관은 “가뭄 때문에 농민들이 고통을 겪을 것”이라며 “이 부문에 재정을 투입해 그들을 돕고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이 어려운 시기에 생존하는 법을 가르치려 한다”고 블룸버그 통신에 말했다.

TMB은행이 2월 19일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엘니뇨로 유발된 가뭄으로 태국경제에 840억 바트(약3조 원)의 손실이 예상되며 자동차, 가전제품, 농기계 같은 내구재 수요가 줄어들 전망이다. 가전업체 ‘싱어 타일랜드’에서 농약업체 ‘파토 케미칼’에 이르기까지 기업 수익이 줄어오고 있다. 아피삭 장관에 따르면 농업은 태국 국내총생산(GDP)의 8%를 차지한다. 싱가포르 크레딧스위스 그룹의 경제 분석가 산티타른 샤티라타이에
따르면 지난 2년 간 농업생산은 해마다 7~8% 줄었으며 농민의 수입 대비 부채 비율은 100%에 이른다.

프라팟폰에게 농민교실 수강은 생존에 필요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전략을 얻을 기회를 의미한다. 그녀는 방콕에서 북쪽으로 190㎞ 떨어진 차이낫 성(省)에 농지를 갖고 있다. 4대째 쌀농사를 짓는 그녀는 2014년 하반기 가뭄이 시작되기 전까지 15년간 매년 3모작을 해왔다. 그녀의 지난번 수확은 평소의 10분의 1이었으며 대부분 쥐가 먹어치웠다. 프라팟폰은 “청대콩을 재배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것을 기를 물조차 충분치 않다”며 “농지가 말라 쩍쩍 갈라졌으니 그 땅에서 무엇을 키울 수 있겠는가”고 말했다.

태국 군사정부는 가뭄으로 고통을 겪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지난해 112억 바트의 예산을 마련하고 농민들에게 물을 덜 쓰는 대체작물 경작을 권장하는 한편 부채 상환을 늦춰주었다. 정부는 물가를 안정시키고 농민을 재교육하기 위해 5월 1일 시작되는 새 회계연도 예산에 101억 바트를 배정했다. 태국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주요산물인 쌀이 밀이나 옥수수보다 농사에 2~3배 많은 물이 들어간다고 해서 이제 표적이 되고 있다. 태국 중부 평원의 주요 수원(水源)인 부미볼 댐과 시리킷 댐이 1994년 이래 최저 수위를 보이는 가운데 정부는 5월 시작되는 모내기철에 태국의 쌀 생산을 2700만 톤으로 낮추기를 원한다. 이는 5년 평균보다 25% 적은 양이다.

농민교실 개설
대체작물 경작법 교육

태국의 쌀 농가는 10년 넘게 정부 보조금을 받았다. 보조금 덕분에 탁신 시나왓 전 총리와 그의 여동생 잉락 시나왓 전 총리는 농민들 표를 얻었다. 보조금은 또한 쌀 증산을 부추겨 현재 정부가 팔지 못해 안달하는 기록적인 1780만 톤의 쌀 재고로 이어졌다. 정부 입장에서는 쌀 생산을 줄이면 국제시세를 끌어내리는 과잉 공급을 해소할 수 있지만 농민들에게 쌀농사를 덜 짓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쌀 생산 농민들은 지난 10년 간 태국 정치 불안과 관련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한 시나왓 가문은 2001년 이래 모든 전국적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쿠데타로 인해 실각했다.

혁명 지도자 출신인 프라윳 찬-오차 총리는 틈만 나면 방송에 출연해 농민들에게 쌀농사를 덜 지으라고 촉구해왔다. 군사정부는 농민들에게 농민교실에 출석해 변화에 속도를 내자고 권유하고 있다. 농민 8000명이 거주하는 상카부리에서 정부는 앞으로 석 달에 걸쳐 농민 250명씩을 15일 과정의 교육에 참여시키기로 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을 배정했다. 교육 참가자는 정부로부터 하루 200 바트(약 7000원)의 수당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희망자가 몰려 추첨으로 수강생을 선정한다. 아피삭 장관은 “예산은 한정돼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도울 필요가 있다. 정부 돈에 의지해 생존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태국에서 활동하는 학자로 태국 법률과 정치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낸 바 있는 데이비드 스트렉푸스는 일부 농민들이 경제상황에 좌절해가고 있지만 군사통치 아래에서 그들의 감정을 표출할 통로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나 소농(小農)의 경제적 복지가 정부의 대단한 우선사항인 것 같지 않다”면서 농촌지역의 정치적 긴장이 현재 안전에 위협이 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쇠락하는 경제의 효과가 쉽게 불꽃을 촉발하고 뭔가를 터뜨릴 어떤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타는 불이다”고 말했다.

농부에서 수강생으로 변신한 차이야포이 팍-온(50)에게 지난 2년은 이전 정부의 쌀 수매 사업 덕분에 좋았던 시절과 확연히 대비되는 시절이다. 그는 과거를 가리켜 “내 생애 최고의 때”라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쌀을 재배하기를 선호하지만 정부가 마련한 교육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면서 “먹고 살 다른 길이 있다. 희망이 있다”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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