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미국 관리에게 수백만 달러를 줬다(Seoul Gave Millions to U.S. Officials).”

19761024,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워싱턴포스트(WP) 1면에 충격적인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박동선이라는 한국인이 한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연간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 상당의 현금을 90여 명의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에게 전달하는 매수공작을 벌였다는 내용이었다.
 
돈을 받은 정치인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나열한 이 기사의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워싱턴과 뉴욕의 언론들은 한국 정부의 미() 의회 로비에 대해 연일 경쟁적인 폭로전을 이어갔다. 1970년대 중반 한미관계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운 코리아게이트의 서막이었다.
 
워싱턴의 마당발
코리아게이트의 핵으로
 
사건의 핵심에 놓인 박동선 씨는 미국산 쌀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재미(在美) 한국인 실업가였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조지 타운대를 졸업한 박 씨는 워싱턴의 마당발이었다.
 
특히 그가 1960년대 워싱턴 시내에 개설한 조지타운 클럽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제럴드 포드 부통령까지 출입했을 정도로 주목받는 고급 사교장이었다. 박 씨는 이 자리를 미국산 쌀 수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회의원들과 교류하는 장()으로 활용했다.
 
미국 사법당국은 박 씨의 이러한 활동을 한국 정부 차원의 정치적 로비로 규정하고 내사에 들어간 것이었다.
 
박 씨의 혐의는 외국인의 미국 내 로비활동 등록법(Foreign agent registration act)’ 위반에 그치는 것이었지만, 미 법무성의 칼끝은 박 씨를 넘어 한국 정부를 겨누고 있었다.
 
격화된 반한감정사면초가
 
WP의 첫 보도가 나간 직후 윤하정 당시 외무부 차관은 주미 한국대사관에 사건의 진상과 미국 정부의 입장 파악을 지시했다.
 
그러나 국무성 관리들도 언론 보도 이상의 내용은 모르는 눈치였다. 그들은 해당 보도에 대해서도 그해 하원 선거 및 의장 재선 문제와 관련된 정치적 기사 정도로 취급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미국 내 여론은 달랐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에 분노했던 미국인들은 의회마저 부패에 찌들었다는 언론의 폭로에 치를 떨었다. 동시에 한국은 뇌물 공여를 통해 국익을 꾀하는 몹쓸나라로 인식됐다.
 
더욱이 당시 베트남전의 오랜 수렁에 빠져 있던 미국 사회에서는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것은 물론 주한미군도 철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3선 개헌, 유신 선포, 잇단 긴급조치 선포 등 한국 정부의 독재와 인권탄압을 보는 미국인들의 시각도 곱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론의 동향에 민감한 미 의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예전부터 한국에 대해 비판적 성향을 갖고 있던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삭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친한파였던 미국 국회의원들도 하나둘씩 한국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주미대사관 직원들이 평소 친분이 있던 의원들과 접촉해 반한 정서를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그들은 한국 외교관과의 접촉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11월에는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주미 대사관에 근무하던 김상근 참사관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 씨는 망명 후 이른바 백설 작전(Operation Snow White)’을 폭로해 한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백설 작전이란 김 씨에게 맡겨진 특별 임무였는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 내 긍정적 여론을 유도하기 위해 미국의 정치인과 언론인·기타 영향력 있는 학자들을 포섭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같은 폭로는 안 그래도 땅에 떨어진 한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결과를 낳았고, 미국인들의 뇌리에 코리아게이트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부패사건으로 깊이 각인됐다. 19776월 말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한 미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 의혹 역시 한미관계에 커다란 악재였다. 이러한 도청을 통해 박정희 당시 한국 대통령이 박동선 씨에게 미국 내 로비 활동을 지시한 정황이 포착됐다는 것이 기사의 내용이었다.
 
한국 외무부는 즉각 주한 미국대사를 초치해 기사의 사실 여부를 확인했지만 미 대사는 즉석에서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윌리엄 포터 전 주한 미국대사가 CBS와의 인터뷰에서 청와대 도청 사실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갈등은 재현됐다.
 
박동진 당시 외무장관은 리처드 스나이더 미국대사를 초치(招致·사람을 불러서 오게 함) 했고, 미국 측도 우리 정부의 대응에 정식으로 유감을 표시하면서 한미관계는 꼬일 대로 꼬여갔다. 그리고 이 같은 분위기가 미국 언론을 통해 고스란히 보도되면서 미국 내 반한 정서는 점점 고조돼갔다.
 
이런 가운데 코리아게이트는 지미 카터가 인권 외교를 내세우며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큰 쟁점으로 부각됐다. 카터 대통령이 선거 기간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선언했던 탓이었다.
 
같은 해 7월에는 특별검사팀까지 꾸려졌다. 수석 조사관으로 임명된 것은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백악관의 비밀 녹음테이프를 입수해 닉슨 전 대통령의 사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레온 자워스키 검사였다.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자워스키 검사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특검은 별다른 수사 진전사항도 발표하지 않은 채 몇 달 뒤 활동을 중단했다.
 
외교채널 본격 가동
해결 실마리
 
이런 가운데 영국 런던에 머물고 있던 박동선 씨가 그해 8월 중순 한국으로 귀국했다. 미국과 영국 사법당국 간에 협조 기미를 눈치채고 몸을 피한 것이었다.
 
간발의 차로 박 씨를 놓친 미 사법당국은 한국 정부에 박 씨의 미국 귀환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박 씨는 미국 시민권자가 아닌 한국인이었기에 정부로서는 그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이에 윤 전 차관은 박 씨의 귀국 직후 법무부에 박 씨에 대한 검찰 조사를 요청했다. 박씨를 미국에 보내지 않는 대신, 철저한 조사 내용을 미국 측에 전달해 문제를 마무리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조사 결과 박 씨의 행동은 외국인의 로비활동 등록법 위반에는 해당할지언정 언론에 보도됐던 만큼 엄청난 범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미 사법당국의 수사를 계속 피한다면 마치 중대한 범죄사실을 숨기는 것처럼 보여 오해는 더욱 커질 우려가 있었다.
 
결국 정부는 박 씨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미국 측의 수사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박동진 외무장관이 미 국무성 측에 이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
 
이때부터 박 씨에 대한 미국 측 수사를 둘러싼 한미 간의 외교교섭이 시작됐다. 벤저민 시비레티 미 법무차관과 김종운 법무차관이 그해 10월과 19781월 서울에서 만나 수사 장소와 수사 방식 등을 협의했다.
 
시비레티 차관은 미국으로 돌아가 상하원 윤리 위원회에 이 같은 수사 내용을 보고했다. 그러나 윤리위원회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일부 의원들이 박 씨가 의회 조사에 적극 협조하지 않는다면 주한미군 철수 보완 조치와 대한(對韓) 식량원조 등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노골적인 위협에 나선 것이었다.
 
의회에 약한 국무성은 우리 외무부에 양해를 구하며 협조를 요청했다. 외무부 역시 미 의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박 씨의 미국 체류 기간 완전한 신분보장과 면제권 부여 등을 내용으로 하는 양해각서를 교환했고, 박 씨는 그해 223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윤광제 작가>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