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불화가 다시 선보이게 된 것은 불과 40여 년밖에 안 된다. 1967년 일본의 구마가이 노부오는 <조선 불화징>이라는 논문을 통해 막연히 송나라 불화라고 알고 있는 70여 점의 불화들이 사실은 고려 불화와 조선초기 불화라는 것을 고증했다. 이를 계기로 1978년 야마토분카칸에서 고려불화 52점을 한 자리에 모아 특별전을 개최함으로써 그 실체가 세상에 확인되었다.

그것은 한국 미술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후 속속 고려불화가 발굴되어 현재까지 160여 점 정도가 알려졌다. 대부분 일본의 사찰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미국과 유럽 박물관에 1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돌이켜 보건대 30여 년 전만 해도 국내엔 본격적인 고려불화가 한 점도 없었다.

오직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된 오백나한도 7점뿐이었다. 그러나 삼성 미술관 리움·호림박물관·아모레퍼시픽 미술관·용인대학교 박물관 등 사설박물관과 개인 컬렉션이 외국에서 사들여 온 현재 고려불화 12점, 오백나한도 8점을 소장하게 되었고 그중 7점이 국보,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 불화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일찍히 수입해 간것도 있고, 여말선초에 왜구들이 약탈해간 것도 적지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고려 불화는 당대부터 유명하여 원나라 문헌에 “화려하고 섬세하기 그지없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고려 불화라고 일컬어지는 불화들은 규슈 가가미진자의 한 점을 제외하고는 절집의 대형 벽화가 아니라 폭 80㎝, 높이 150㎝ 정도의 아담한 채색 탕화들로 대개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원나라 간섭기에 유행했던 그림이다. 이 탱화들은 절집의 법당이 아니라 귀족들의 원당에 장식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즘 가정집 안에 작은 예배 공간을 만들어 놓는 것과 비슷한 신앙 형태다. 그래서 유난히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고려 불화는 아미타여래도, 지장보살도, 수월관음도 등 내세와 현세의 복을 구하는 구복신앙이 대종을 이룬다. 그중 고려불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은 <수월관음도>다. 이 <수월관음도>는 보타낙가산의 금강대좌에 반자부좌하고 앉아 선재동자를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일정한 도상이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35점이 거의 비슷한 구도로 되어 있다.

수월관음은 어름다운 무늬를 금박으로 수놓은 붉은 법의에 흰 사라(면주실로 거칠게 짠 비단)를 걸치고 반가부좌를 틀고서 용맹장부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곁에는 항상 지니고 다니는 정병에 버들가지를 꽂아 우리 그릇에 받쳐 놓았고 등 뒤로는 시원스럽게 솟아오른 청죽 두 가닥, 발 아래로는 흰물결이 일렁인다. 불화 부분부분의 세세한 표현은 각 작품마다 약간씩 달라 일본 다이도쿠지 소장품에는 이채롭게도 동해용왕을 그려 넣었고 선재동자의 모습은 아주 귀엽게 폭마다 다르게 그렸다.

고려불화의 압권은 붉은 법의 위에 걸친 흰 사라의 표현에 있다. 그 기법이 얼마나 정교한지 속살까지 다 비친다. 곁에서그림을 보던 한 학생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것 같다"며 감탄하며 지나간다. 뒤이어 온 젊은 여성 관객은 ‘시스루 패션' 이라며 그신기한 기법에 놀라움을 표한다. 수월관음의 우아한 자태와 화려한 복식 표현은 한국 미술사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정리=김정아 기자>
<출처=눌와│지은이 유홍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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