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방금 시미밸리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로드니 킹을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경찰관 4명 중 3명에게 무죄 평결을 내리고 1명은 평결을 유보했습니다”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 10분. 텔레비전 화면을 지켜보던 많은 미국인은 자기 눈과 귀를 의심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우리 총영사관에서 다른 직원들과 뉴스를 시청하던 당시 박종기 교민 담당 영사도 마찬가지였다. 과속 운전 단속에 적발된 상황에서 경찰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흑인인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 평결을 받은 것은 의외였다.
‘정의가 없다’며 분노한 흑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평결이 나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LA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이 시작됐다. LA 총영사관은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소요 현장을 보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했다. 박종상 총영사는 그 시각 흑인 밀집 지역이나 코리아타운에 있는 동포들에게 안전지역으로 피하라고 현지 동포 방송을 통해 요청했다. 밤이 깊어지자 폭도들은 사우스 센트럴에서 분탕질을 끝낸 뒤 가까운 코리아타운으로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40만 LA 동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나긴 악몽이 시작된 첫날 밤이었다.
‘서울시 라성구’ 빛과 그림자
LA 폭동 직전 로스앤젤레스는 ‘서울시 라성구(羅城句)’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 동포는 남대문시장처럼 작은 가게들을 한데 모아놓은 스왑밋(swap meet) 점포나 세탁소, 주류 판매점, 식품점, 담배가게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들의 가게는 주로 기존 상권보다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코리아타운이나 흑인들이 많이 활동하는 서·남부 지역에 몰려 있었다. 동포들은 억척같이 일에 매달리면서 알뜰살뜰 재산을 모았지만 그 과정에서 흑인 고객들과 크고 작은 일로 부딪치는 일들이 많았다.
그 와중에 LA 폭동 한 해 전 ‘두순자씨 사건’ 등이 터지면서 흑인 사회의 반한 감정은 지극히 악화됐다. 1991년 3월 상점 주인 두순자씨는 음료수를 훔치려 했다는 문제로 10대 흑인 소녀와 싸움을 벌이던 끝에 소녀를 총으로 살해했다. 두씨가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흑인들은 극렬히 반발했다. 당시 흑인 랩 가수 아이스큐브가 내놓은 ‘블랙코리아’라는 충격적인 노래도 혐한, 반한 분위기를 자극했다.
동포 사회와 흑인 사회 사이의 감정이 이렇게 좋을 리 없었던 이 시기에 LA 폭동이 터진 것이다.
“사실상 전쟁터…초강대국 치안 이 정도인가 탄식”
박 영사는 LA 폭동 이틀째인 4월 30일 오전 일찍 위험을 무릅쓰고 코리아타운으로 향했다. 총영사관 5층 회의실에서 30여 명의 동포단체 대표와 새벽 대책회의를 끝낸 뒤 직접 피해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만에 하나 인명 피해가 있는지 챙겨야 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월남전에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박 전 영사는 인터뷰에서 “코리아타운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 모습은 그야말로 전쟁터와 같았다”고 밝혔다.
점포들은 불타거나 유리가 깨져 성한 곳이 없었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어디선가 꽝꽝 총소리도 들렸다. 박 영사와 떨어져 코리아타운을 돌아보던 재향군인회 회장은 이 과정에서 폭도들로부터 허벅지에 총을 맞기도 했다. 불안 속에서 밤을 넘긴 동포들은 불타버린 가게, 약탈 당하고 텅 비어버린 점포를 발견하고서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처참한 현장이었다. 박 영사는 다행히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본부 보고와 대책 논의차 정오 무렵 총영사관으로 돌아왔다.
우리 가게는 우리 스스로 지키겠다고 나선 동포청년단원 1명이 밤중에 다른 동포들에게 폭도로 오인받아 총격을 받은 것이다. 박종상 총영사를 비롯한 직원들은 첫 사망자 발생 소식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폭동 사흘째인 다음날 오전 폭도들이 물러나면서 직원들도 다시 총영사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악몽의 이 사흘간 동포 1명을 포함해 58명이 숨지고 2천여 명이 부상했다. 그러나 그 기간 어디에서도 미국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총영사관은 일찌감치 미국 경찰 당국에 코리아타운 보호를 요청했지만 “그곳에는 못 들어간다. 통제 불능이다"는 답만 들어야 했다. 박 전 영사는 인터뷰에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면서 “치안 자체가 없는 삼류국가도 아니고 초강대국 치안이 이 정도인가 하는 탄식이 나왔다”고 지적했다.
미국 공권력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을 바라만 봐야 했던 LA 동포 중에는 “한국 해병대라도 불러오지 않고 뭐 하느냐”는 울분에 찬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성금 분란에 총영사관 점거
자살 소동까지
LA 폭동은 사흘 만에 끝났지만 그에 못지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격앙된 동포들 사이에서 본국 국민이 보내온 성금 분배를 두고 큰 분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범교민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피해 복구 대책이 논의되고 있는 와중에 ‘4·29 폭동 피해자 협의회’라는 단체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두 단체가 극렬한 충돌을 빚으면서 총영사관 처지도 난감해졌다. 박 영사는 피해자협의회 자체 대책 회의에서 “저놈부터 죽여”라는 험악한 집단적인 협박까지 들었으나 침착한 설명으로 사람들을 진정시킨 일도 있었다. 피해자협의회 측은 본국 국민 성금 450만 불이 총영사관 정부 예산 계좌로 입금됐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인 7월 21일 버스 수 대를 빌려 타고 총영사관으로 몰려왔다. 피해자 수백 명이 총영사실을 비롯해 건물을 점거하고 연좌시위를 벌이며 성금 전액을 즉각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총영사가 부재한 사이 박 영사는 사실상 감금됐고 ‘투신자살하겠다. 공관에 불을 지르겠다’는 일부 교민들의 위협도 들어야 했다. 성금 문제는 이후에도 교민사회 내부에서 계속 큰 논란이 됐다.
박 전 영사는 인터뷰에서 “동포 단체들이 제대로 합의했다면 이를 종잣돈으로 삼아 동포사회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기금도 조성할 수 있었는데 너무 허탈했다”면서 “자살 소동까지 벌이는데 성금 문제로 행여 인명피해가 나서는 안될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관 방화 협박, 점거 농성 행위는 미국 실정법을 위반한 중대한 불법행위였지만 주재국 당국에 보호를 요청하지 않았다”면서 “그렇게 되면 동포들이나 총영사관 모두 외국에 망신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전했다.
박 전 영사는 LA 폭동 전반에 대해 “흑인 폭도들이 백인 지역으로 향하는 길목에 코리아타운이 있어서 우리에게도 불똥이 튀었다”면서 “그러나 동포들이 흑인을 상대로 빨리 돈을 버는 데만 신경을 쓰고 반감을 산 측면도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윤광제 작가>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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