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佛 대사관서 협조 거부

표류 중 만난 선박들도 외면
 
1975430일 월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 급박한 상황에서 미처 월남 땅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심 거리를 정신없이 헤맸다.
 
이런 군중 속에는 당시 주()월남 한국대사관의 김창근 2등서기관 일행도 있었다. 그는 강변에 있는 일본대사관의 정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 베트남군의 사이공 진주를 앞두고 미국대사관에서 헬기 탈출을 시도하다가 좌절된 직후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다.
 
상공에는 수십 대의 미군 해병대 헬기가 귀청을 찢는 기계음을 내며 선회하고 있었다. ‘저 헬기만 타면 살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김 서기관은 헬기를 향해 뛰어가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김 서기관이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때 미군은 헬기 수십 대를 동원해 귀대하지 못한 해병대원 1명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김 서기관의 월남 탈출기는 극한 상황에 놓인 약소국(弱小國) 국민의 서러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당시 서기관이었던 김창근 전 카자흐스탄 대사는 20119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그 때 상황을 들려줬다.
 
월남 대통령궁 폭격
철수 준비 개시
 
197548일 오전 8시께. 월남 주재 한국 대사관 2층 사무실로 쓩쓩하는 굉음이 들리더니 곧 무언가 터지는 쾅쾅하는 소리가 김 서기관의 귀를 때렸다. 동시에 사무실 유리창 파편이 발 밑으로 쏟아지고 대사관 직원들은 혼비백산했다. 대사관에서 100m 거리에 있는 월남 독립궁(대통령궁)이 전투기 폭격을 당한 것이다.
 
다들 베트콩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폭격은 월남 공군의 웬탄쭝 중위가 한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공식적으로는 이 조종사가 북베트남 공산당 프락치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 서기관은 당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고 철수할 때 정부가 자신의 가족을 챙기지 않아 보복한 것이란 말을 주변에서 들었다. 이 직후 한국대사관은 월남 철수를 위해 미대사관과 본격 접촉에 나섰다. 김영관 대사가 이날 김 서기관에게 공문을 주면서 미대사관에 전달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유사시 철수 협조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공문을 받은 미대사관은 김 서기관에게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오면 무조건 포인트 10으로 오라고 했다. 당시 미대사관은 월남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었으며 포인트 10은 미국인이 거주하던 아파트였다. 이날 이후 김 서기관의 주 업무는 라디오 듣기가 됐다. 잘 때도 라디오를 끼고 있었다. 1천여명의 교민 철수를 위한 준비도 시작됐다. 한국에서 전차양륙함(LST) 2대가 오기로 돼 있었는데 교민 수송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LST를 사이공 부두로 대야 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월남 정부는 결사 항전을 외치면서 주민 안정에 필사적이었다. 심지어 전투기를 띄워 사이공 주변을 맴돌게 하면서 주민을 안심시키려 했다.
 
이 상황에서 월남이 교민 철수용 LST 입항을 허용할 리 없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구호물자용이란 구실이었다. 구호물자를 전달하려면 시내 가까이 와야 하기 때문이다.
 
월남 정부는 당시 LST의 입항을 축하하며 환영식도 열어줬다. 김 서기관에게는 훈장도 줬다. 그러나 LST의 입항 목적이 월남 탈출이란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월남 외무부 직원까지 자신의 가족을 LST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대사관은 교민 철수를 앞두고 노래자랑 등의 행사를 며칠간 열었다. LST가 언제 떠날지 모르기 때문에 교민을 모여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길게는 20년 가까이 월남에 거주한 교민들은 철수의 급박성을 느끼지 못하며 주저했다.
 
그러다 LST426일 떠나기로 갑자기 결정되면서 대사관은 밤새 급조한 승선표를 교민에게 발급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1300여명의 LST 탑승자를 확인해보니 한국인 교민보다 한국인의 월남인 부인, 그 친정 가족, 한국과 무관한 월남인·중국인 등이 더 많았다. 상황이 급박한 나머지 대사관은 별 수 없이 그대로 LST를 출항시켰다.
 
대사관 직원 철수
미군 헬기만 믿었다
 
한국 정부는 대사관에 적절한 시점에 철수하라고 지시했었다. 이에 4월 초까지 대사관 직원의 가족은 떠났고 LST가 출항한 후에는 대사 등 10여명의 직원만 남았다. 미대사관은 27일께 비행기를 마련해줄 테니 연락이 가면 비행장으로 오라고 다시 연락해 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 비행장이 폭격당하자 미대사관은 28일 오전 포인트3으로 이동하라고 급전을 쳤고, 대사관에 있던 직원·교민 일행은 70떨어진 포인트3으로 부리나케 이동했다.
 
그런데 대사 차량을 선두로 현지에 도착해보니 울타리 문은 잠겨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대사 차량이 포인트3을 한바퀴 돌아보더니 갑자기 전력 질주했다. 목적지는 미대사관. 그곳은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김 서기관이 한국외교관이라고 밝히고 진입해 보니 김 대사는 이미 미대사의 방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김 서기관은 그 앞에서 기다리다가 감감무소식이자 급히 대사관 뒷마당으로 갔다.
 
그런데 김 서기관 일행이 뒷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철커덩하며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뒷마당과 헬기탑승장으로 이용된 앞마당·옥상을 연결하는 철문이 닫힌 것이다. 미군 해병대는 그때부터 헬기에 탈 인원만 불러내 문을 통과시켰다. 물론 미국인이 가장 먼저 호명됐다.
 
철수작전은 더디게 진행됐고 오후 8시가 넘어도 대사관 일행 차례는 오지 않았다. 미대사관의 협조를 다시 구하기 위해 이대용 공사가 대사관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공사는 앞서 미대사 방에 들어간 김 대사가 이미 떠났다는 소식만 갖고 나왔다.
 
피를 말리는 기다림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29일 새벽에야 한국인과 월남인 등도 일부 헬기에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새벽 4시가 넘어서 갑자기 휘파람 소리와 함께 미 해병대가 총구를 한국인 등을 향해 겨누면서 쏠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그러다 미 해병대가 한두 명씩 슬금슬금 대사관 건물로 들어갔고 마지막에 들어간 병사가 출입구를 닫았다. 그들은 헬기 이륙과 동시에 마당으로 최루탄을 쏘기까지 했다.
 
미대사관을 통한 탈출이 무산되자 김 서기관 일행은 걸어서 10분 거리의 프랑스대사관을 향했다. 프랑스는 남·북베트남과 등거리 외교를 하고 있어 북베트남으로부터도 치외법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수차 프랑스대사관의 문을 두드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김 서기관 일행은 다음날인 30일에는 일본대사관으로 갔다. 일본은 경제원조 등으로 북베트남과도 우호국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대사도 우리 대사관 일행의 피난처 제공 요구를 거절했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으로 들어온 뒤인 51일 김 서기관 일행은 프랑스병원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 병원으로 일대사관의 와타나베 참사관이 왔다. 그는 한국외교관은 잡히면 북한에 넘겨진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김 서기관이 자살을 결심한 것은 그 말을 듣고서였다. 병원 뒷마당에서 죽으려고 면도날을 구하려던 때에 병원에서도 한국인 일행을 쫓아냈다.
 
김 전 대사는 인터뷰에서 병원에서 나가라고 하니까 살고 싶다는 오기가 들더라고 말했다. 김 서기관 일행은 교민회관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일부 교민은 여기서 독자적인 탈출 계획을 세웠다. 다른 대사관 직원은 도망치다 잡히면 오히려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출을 포기했지만 김 서기관은 탈출에 합류했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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