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첫 비행기로 즉시 귀국 바람 

19611010일께. 일본 도쿄에서 6차 한일회담(196110~644)을 준비하고 있던 배의환 회담 수석대표와 정일영 당시 서울대 교수(전 외무부 차관)에게 급거 귀국하라는 명령이 외무부 본부로부터 날아왔다. 회담 준비차 일본으로 건너간 지 2주밖에 안 됐을 시점이었다. 바로 직전에 5·16쿠데타로 5차 회담(6010~615)이 갑자기 종료됐던 터라 정부 대표단 일원인 정 교수는 큰 궁금증을 안고 서울로 들어왔다. 들어오기 전까지는 귀국 사유에 대해서는 비밀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입국 후 서울 장충동 동국대 입구에 있던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공관으로 안내됐다. 거기서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대면했다. 한일협정의 기본 틀을 만든 것으로 평가되는 박 의장과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 간 회담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JFK “미국 오는 길에 일본 들렀다가 오라
 
의장실에 있는 박 의장과 김 부장은 유쾌한 표정으로 정 교수 일행을 맞았다. 박 의장은 미국에서 통지가 왔는데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만나자고 한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케네디 대통령이 방미(訪美) 조건으로 미국에 오는 길에 도쿄를 들러 이케다 총리와 이야기 좀 하고 오라고 한 사실을 언급했다. 정 교수는 그 자리에서 그간 한일 회담 경과와 이케다 총리와의 회담 시 의제(議題) 등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명동 거리로 나가 저녁을 해결하고 다음날 일본으로 되돌아가 회담 준비에 착수했다.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의 요청대로 미국을 방문하는 길인 19611111일 도쿄로 가서 그 다음 날 이케다 총리와 회담을 했다. 당시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진영 결속 강화를 위해 미국이 한일 수교에 공을 들인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이케다 회담의 이런 배경은 2005년 한일회담 외교문서 공개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이다.
 
당시 외교문서 상에는 정부가 자주 외교라는 평가를 얻으려고 고심 끝에 일본을 전격 방문한 것으로 나왔다. 최덕신 당시 외무장관이 1023일자 보고서를 통해 일본과 입장이 흡사한 미국에 방문한 뒤 한일 수교가 되면 자주성 없는 외교라는 세간의 평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선() 한일 회담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 이런 평가의 큰 이유가 됐다.
 
그러나 당시 김종필 부장이 일본을 방문, 자민당 인사들에게 이케다 수상이 박 의장을 초대해 고급 정치회담을 열면 어떠냐고 제안한 것이 1024일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 장관 보고서 이전부터 박 의장의 방일(訪日) 검토가 정부 내에서 진행됐을 것으로 분석된다.
 
정일영 전 외무부 차관은 지난 2011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 의장의 방일이 케네디 대통령의 권유 때문에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인지 대해서는 나는 당시 (모든 상황을)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다만 이케다 총리가 공항까지 나가 박 의장을 맞이하고 그 자리에서 환영사를 낭독하는 등 파격적인 의전을 한 것을 보면서 워싱턴의 입김을 느꼈다고 말했다.
 
의장 일본이 몇 억 달러나 내놓겠나
 
19611111일 일본을 찾은 박 의장은 이케다 총리와의 회담 전날인 그날 밤 숙소인 영빈관에서 2시간가량 정 교수와 독대했다.
 
정 교수로부터 그동안의 회담 진행 경과 등에 대해 다시 설명을 들은 그는 정 교수에게 일본이 몇 억 달러나 내놓겠나라고 물었다. 정 교수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일본의 대응 전망을 설명했다. 일본이 현찰로 달러를 주지는 않으려고 할 것이며 대신 물자나 산업 노하우를 가져올 것이란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정 교수는 박 의장에게 그 경우 우리 산업 및 경제가 일본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도 설명했다. 그의 전망대로 이케다 총리는 12일 회담에서 현금이 아닌 산업 건설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명목도 배상(賠償)이 아닌 경제협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 의장은 우리는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받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 의장은 청구권 문제에 대해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는 청구권이라면서 상당한 액수의 청구권을 한국이 갖고 있는데 일본이 5천만 달러를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케다 총리는 법적 근거가 확실한 항목에 대해서만 청구권을 지불하고 그 외 항목은 무상원조로 하고, 국민감정상 곤란할 경우 경제협조 등의 명목으로 저리차관을 제공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회담에 통역으로 참여했던 정 전 차관은 박 의장은 당시 통역이 필요 없었는데도 내게 통역을 시켜 회담 시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면서 박 의장은 추후에 친일파니 비밀회담이니 하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회담 내내 결백한 태도를 취했다고 전했다.
 
정 전 차관은 회담에서 배상 문제와 함께 청구권조로 받느냐 경제협력조로 받느냐는 말이 오갔고 결국 청구권 및 경제협력이 된 것이라면서 한일 청구권 협정의 윤곽은 그때 잡힌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1965년 체결된 한일 재산 및 청구권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의 근본 성격이 이 회담에서 정해졌다는 뜻이다.
 
알려진 대로 이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박정희·이케다 회담 1년 뒤에 열린 김종필·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회담(196211)에서 정해졌다.
 
일본의 거듭된 몽니
 
국제법을 전공한 정 교수가 한일회담에 처음 참여하게 된 것은 5차 회담 때부터였다. 일본은 회담에서 자국만의 논리를 고집했다. 특히 개인 보상 문제와 관련, 일본은 오히려 일본인이 한국에 두고 온 재산을 거론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주장하는 청구권의 일부는 변제됐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5차 회담의 청구권 논의(19611~5)에서 우리의 청구권 요구에 대해 증빙자료부터 이야기하자며 몽니를 부렸다. 개인 베이스의 보상을 거론하면서 일본법에 의해 개인의 신청을 받아 일본 정부가 지급하겠다는 논리를 고집했다. 일본이 증빙 자료 및 개인 보상을 거론한 것은 우리 정부가 그런 자료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약점을 노린 일종의 협상 전략이었던 것으로 국내외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일본법에 따라 보상한다는 주장을 편 것은 국가 간 협상이란 근본 틀을 무시한 태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교수도 당시 우리가 아직 식민지 하에 있는 줄 아느냐고 일본 측을 반박했다. 그러면서 국제법적으로 통상 거증(擧證) 의무는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지만 이 경우에는 일본이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면서 그 이유를 내가 말할 필요가 있느냐. 자료는 일본이 다 갖고 있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에도 과거를 따지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정 전 차관은 당시 수많은 난제(難題) 해결에 있어서 쌍방간 법이론적인 면에서 충분한 논의가 행해지지 않고 정치적으로 절충된 감이 없지 않다면서도 “50년 전의 일을 현재의 잣대로 비판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위안부 문제는 당시 거론되지 않았던 것이라면서 청구권 협정의 미해결 사안이 아니라 인도주의 차원에서 시효를 두지 않는 국제법적인 강행법규(Jus cogens) 위반 사안으로 다뤄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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