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없었다. 존재도 없었다. 살려둘 이유도 없었다. 1971년 8월 23일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인천 시내버스를 타고 나타난 군인들이 군경합동진압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폭한 사건이 벌어진다. 당국에 의해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이 일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다. 영화 <실미도>는 ‘1·21 김신조 사건’에 놀란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가 작전(김일성 암살과 주석궁 폭파)성공시 모든 형벌을 취소해 준다는 조건으로 사형수, 무기수, 일반 재소자 등 사회 밑바닥 계층을 포섭해 만든 이른바 ‘684부대원’들의 훈련과정과 그들이 총부리를 김일성이 아닌 청와대로 돌릴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사연을 담고 있다. 지난 10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베일을 벗은 영화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에게 작품 전반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영화가 처음으로 공개됐는데 소감은.▲찍는 동안 마음 고생, 몸 고생 있는 대로 다해서 이제 보기도 싫다. 오늘도 안 봤다.

-당시의 생존자들도 만나봤나.▲그렇다. 그들이 한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죽은 사람들 너무 나쁘게 그리지 마십시오”라고 하더라.

-어디까지가 실제 벌어졌던 일인지 궁금하다. ▲우선 684부대원 31명의 캐릭터는 가상이다. 당시 31명 중 7명은 훈련 중 사망하고 버스에서 자폭한 후 살아남은 4명도 바로 사형됐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어디서도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외에 고문을 이기기 위해 불로 몸을 지지는 훈련을 한 것이나 애국가보다는 인민군가를 더 많이 부르는 것 등은 HID(북파공작원)의 훈련 중 하나였다는 점을 토대로 했다. 당시 실미도 부근의 주민들도 인민군가 같은 노래를 자주 들었다고 증언했다.

-부대원들이 인근 무의도에서 벌인 강간 사건도 사실인가.▲그렇다. 무의도는 물이 빠지면 실미도에서 5분 정도 거리다. 무의도에 있는 여선생을 강간한 사건의 실체는 더욱 살벌했다. 영화에서는 2명이 빠져나가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그렸으나 원래는 4명이었다. 그중 2명은 현장에서 자결했고 1명은 죽기 직전에 잡혔다. 또 다른 1명은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 장면에서 좀 더 에로틱한 영상을 바랐다면 실망이겠지만(웃음), 그 대목에서는 오죽했으면 강간까지 했을까라는 처절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좀 절제된 표현을 했다.

-실미도 부대가 만들어진 계기인 김신조 사건을 제외하고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구체적인 묘사가 없다. ▲역사적 배경은 슬쩍 슬쩍 지나간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있었지만 실제 자료화면 등은 영화에 넣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권력 실세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건 실화이니 믿고 보십시오”라고 관객들에게 자신 없는 호소를 하는 것 같아서였다.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다보면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컴퓨터 그래픽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들이 고생을 했다. 고난도 훈련뿐 아니라 폭파 장면, 바다로 뛰어내리는 신 등 모두 직접 촬영했다. 7개월 간 연기를 한 게 아니라 진짜 훈련하는 것처럼 임했다. 아, 영화 속에서는 액션을 참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설경구가 가장 애를 먹었을 것이다. 보트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는 신이 있었는데, 다 찍고 컷을 외치고 나니 1명이 보이지 않는거다. 바닷속으로 누가 가라앉았는데, 그게 설경구였다. 그때 자칫 잘못했었다면 이 친구 아마 지금 여기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힘든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실미도에서 촬영하며 두달 동안 마신 술의 양이 1년 동안 먹었던 것보다 많았다면 설명이 되겠는가.

-꼭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실미도의 684부대원들이 아무리 범죄자였다 하더라도 그다지도 처참하게 짓밟힐 이유는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야만적인 국가 권력자들의 각본에 의해 그런 비극이 벌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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