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6일은 50년 전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이 문화혁명(文化革命)을 시작한 날로 꼽힌다. 마오가 1966년 5월16일 홍위병(紅衛兵)에게 내린 명령이 공산당기관지 런민르바오(人民日報)에 실렸다. ‘홍위병에게 명하노니 곳곳에 숨어있는 적들을 찾아내 처단하라’고 했다. 자본주의·봉건주의·관료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반혁명분자들을 ‘찾아내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마오의 명령으로 시작된 문화혁명은 그가 사망한 1976년까지 계속되며 중국을 피범벅으로 뒤덮었다. 150만-200만 명이 타살되었거나 고통에 못이겨 자살했다. 관료·교사·지식인들은 지방 농촌으로 쫓겨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중노동에 시달렸다. 초·중·고·대학은 폐쇄되었다.

마오는 문화혁명이 전근대적 문화와 자본주의 문화를 배척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하는 문화운동이라고 포장했다. 그러나 정적을 근절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문화혁명에 앞서 마오는 1958-1962년 사이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을 강행했다. 개인영농에서 집단농장체제로 바꿔 농업생산성을 높이겠다는 극좌개혁이었다. 그러나 ‘인민공사’에 바탕한 집단농장방식은 가뭄과 겹쳐 생산성을 급격히 저하시켜 2000만~4000만명의 아사자를 냈다. 이들 중 200만-~300만명은 대약진운동에 저항하거나 식량을 훔치다 발각돼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한 마을에서는 한 소년이 너무 배가 고파 식량을 한 줌 훔치다 잡혔다. 지역 관리는 그 소년의 아버지에게 그 자리에서 아들을 산 채로 매장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자식을 죽인 죄책감으로 3일 후 목숨을 끊었다.

1959년 3월 25일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공산당 비밀회의 기록에는 마오의 잔혹성이 드러나있다.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마오는 상하이 공산당에 필요 식량의 3분의1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그는 “인민이 식량 부족으로 굶어죽고 있다. 인민의 절반이 차라리 아사하는 편이 낫다. 살아 있는 절반은 굶어 죽은 자들의 몫을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고 했다.

마오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덩샤오핑(鄧少平)과 류사오치(劉少奇) 등 실용주의파에 의해 밀려나자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홍위병들은 국가주석 겸 공산당 부주석 류와 당중앙서기처 총서기 덩을 체포, 자본주의 추종 ‘주자파(走資派)’라며 닥치는 대로 구타했다.

미국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즈’의 2016년 5월14일자 보도가 50년 전 홍위병의 참혹한 만행을 생생히 전했다. 37세의 첸 얀롱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보일러공으로 살고 있었다. 다만 농지가 3500여 평 있었으나 처분한 지 오래였다.

1966년 8월27일 저녁 무렵 수십명의 홍위병이 첸 씨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첸 씨와 그의 아내를 ‘계급의 적 지주’라며 몽둥이로 마구 때리더니 트럭에 실어 학교로 끌고 갔다. 거기서 첸 씨가 지주가 아니고 노동자 계급이라고 항변하면 할수록 쇠파이프 매질은 더욱 심해졌다. 피를 흘리며 빈사상태에 빠진 첸 씨는 목이 마르니 물 한 모금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홍위병은 거절했고 얼마 후 첸 씨는 숨을 거두었다. 첸씨 부인은 자신도 심한 구타로 피투성이었으며 남편이 맞아죽는 참혹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문화혁명은 마오가 실용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벌인 대학살극이었다. 마오는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을 굶어죽게 한 것도 부족해 몇 년 후 문화혁명을 일으켜 수백만 명을 또 죽였다. 그런데도 마오는 아직 공산당 정권에 의해 국부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언젠가 요세프 스탈린처럼 피의 독재자로 격하될 게 분명하다. 문화혁명과 대약진운동을 겹쳐보면서 베이징 천안문에 걸린 마오의 초상화도 제거될 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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