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남녘땅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하늘을 배회하다 잠시 담양에 내려앉는다. 그것은 소슬하고 또 정갈하게 대나무 숲 사이를 지나 꽃과 나무와 새 그리고 담양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누각과 정자들에 순수하고 무결한 흔적을 남긴다.

담양에는 비가 내린다고 했다. 날짜를 늦추어볼 생각도 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행이란 있는 그대로 보며 느끼는 법이기에 주저하지 않고 광주행 표를 끊었다.

어두웠던 하늘은 마침 정읍을 지나면서 맑아졌다. 사람들은 담양을 대나무의 고장으로 인식하는 편이다. 소쇄원에서 죽녹원 그리고 대나무 박물관에서 대나무 축제로 이어지는 대나무의 향연은 그런 생각이 미치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담양의 숨은 그림은 가장 한국적인 선들이 만나는 곳이자 가사를 읊었던 풍류의 뜰, 정원과 누각에 있다. 담양은 예전부터 ‘담양 갈 놈’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조정에서 많은 신하들을 유배 보낸 곳이었다. 때문에 한양에서 내려온 관리들은 이 물 맑고 볕 좋은 담양에서 수많은 정자와 누각을 지어 살며 때로는 임금을 그리워하고 또 때로는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유유자적했다.

시세의 풍류와 시절의 한탄이 만난 곳, 그리고 대나무 숲에 이는 바람이 그리워질 때. 그때, 담양.

자신을 바라보다 소쇄원

소쇄원은 별서정원이다. 별서정원이라 함은 시류의 벼슬이나 당파 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자연에 귀의해 벗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기 위해 만든 정원을 일컫는다.

조선 중기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축출된 후, 이에 충격을 받고 벼슬길을 등지게 된 양산보가 고향으로 낙향해 소쇄원을 지었다. 소쇄옹은 양산보의 호이다. 한국 민원의 최고 자리에 있는 소쇄원. 이곳에서 당대의 문인들과 선비들은 서로 끝없이 고민하고 대화하며 호남의 사림 문화를 이끌어 갔다.

소쇄원은 자연과 함께 하는 조화의 결정체이다. 정원을 우선하지 않고 먼저 자연에 맞춰 만들었다. 누각과 담장, 본정과 후정 그리고 물길과 바람의 지나감은 모두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로움과 균형 속에서 이어진다.

들녘의 맹렬한 바람은 바로 원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 열기를 누그러뜨리며 뒷산에서 거칠게 내려오는 물은 또 소쇄원의 담장 밑을 통과해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세를 낮추게 된다.

숨을 한 번 늦추고 호흡을 가다듬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은 우거진 대나무 숲의 역할이다. 대나무는 원의 가운데로 깊숙하게 자리하지 않고 마치 벽처럼 또는 호위하는 신하의 그림자처럼 주변에서 소쇄원을 은밀하게 감싼다. 무엇이든 급하게 다가서지 말라는 큰 뜻이 분명 이 소쇄원에 숨어 있다.

소쇄원에 들어서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품이 느껴진다. 그것은 설명을 들어서도 아니고 얕은 지식으로의 접근은 더더욱 아니었다. 물길과 누각 그리고 대나무 숲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람은 이 고즈넉한 공간을 지배하며 서로 긴밀하게 통한 후 소쇄원을 한꺼번에 안는다.

매화나무와 배롱나무는 그 격에 품을 얹어준다. 광풍각 끝에 앉아 이 엄정하되 은밀한 소쇄원에 찾아올 자연들을 생각해 본다. 동백이 처절하게 붉어지는 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여름 소나기의 낙수, 눈이 오는 날 댓 잎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 그리고 가을의 늦은 햇빛도 잠시 내려 앉았겠거니. 양산보는 죽기 전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소쇄원을 남에게 팔지 말며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 말라“

한국 문학의 산실 가사문학관

가사문학관은 소쇄원에서 나와 국도를 따라 담양 방향으로 20여 분을 걷다보면 나온다. 맑은 하늘과 어디에선가 미약하게나마 대나무 향이 묻어나는 바람, 걷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길에는 붉게 물든 연산홍이 피어 남도의 녹음에 시각적인 색채를 입힌다.

가사문학관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앞뜰에 자리하고 있는 소담하게 조성된 정원은 박물관이 가질 수 있는 다소 딱딱한 이미지를 중화시키는 세심한 배려 같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가사인 성산별곡과 사미인곡 그리고 속미인곡, 면앙정가 등은 가사문학의 최고봉이었던 정철과 송순의 작품이었고 함께 담양의 정서를 이끌었던 양산보와 이서 등 모두 담양에 뿌리를 두었던 인사들이었기에 가사문학관은 당연히 담양에 자리했어야 한다.

2층, 3전시실로 구성된 내부에는 송강 정철과 면암 송순, 그리고 양산보와 허난설헌 등의 역사적인 가사문학 자료와 필사본은 물론 선조가 애주가였던 정철에게 하사한 은잔과 송강서원의 현판 원본 등 귀중한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가사인 사미인곡에서 정철은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가 되리라고 노래했다. 님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님 좇으려 하노라던 송강. 한양 태생이긴 하지만 담양은 분명, 송강의 고장이 돼야 할 것이다.

그림자가 쉬다 식영정

가사문학관 옆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등성이. 그곳에 오르면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의 식영정이 있다.

식영정은 전남 기념물 제1호로 16세기 호남의 문인인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식영정 뒤편에 있는 성산은 무등산의 동편 끝자락으로 정철의 성산별곡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식영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광주호에 떨어지는 은빛 반사와 식영정의 그 기품 있는 누각의 자태 말고도 바로 옆에 서있는 커다란 나무에 있다. 수 백 년이 넘는 수령을 이어 오고 있는 이 소나무는 정철의 성산별곡에 나오는 ‘짝맞은 늙은 솔은 조대에 세워 두고’라는 구절을 감안할 때 그 당시에 세워진 소나무로 유추할 수 있다.

강골함과 넉넉함을 동시에 지닌 이 나무는 그야말로 하나의 작품처럼 멋지게 식영정을 보위하고 있다.

고작 ‘멋지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저 흙을 덮고 조용히 식영정과 살고 있는 그 거대한 묵묵함에 여타의 수사가 필요하지 않은 까닭이다. 언덕에서 내려오면 뒤편에 서하당과 장서각이 있으며 행정구역상 광주 지역으로 들어가지만 길 건너에는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다.

담양, 빛을 담고 있는 못이라는 뜻의 담양. 담양이 말하는 그 빛과 못이란 곳곳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수많은 누각과 정자를 말함이 아니었을까.

“삶이, 길 없는 숲에 들어와 얼굴에 걸리는 거미줄을 떼어내며 맴도는 일 같을 때 뿌리로써 서로를 움켜잡고 꼿꼿하게 일생을 뻗어 올린 대나무의 의연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대나무 꼭대기를 쳐다보며, 하늘을 향해 나무 타기를 되풀이하던 소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배한봉 시인의 시 ‘대나무’의 한 구절>

모든 대나무의 휴식 죽녹원

대나무의, 대나무에 의한 그리고 대나무를 위한 죽녹원. 담양 북쪽 성인산 일대 약 16만㎡의 부지에 조성된 죽녹원은 부인할 수 없는 담양의 대표 방문지다.

뜻밖에 소쇄원이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지만 죽녹원을 찾은 많은 이들은 실망을 안고 돌아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죽녹원을 한 바퀴 돌아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생태 전시관을 지나 대숲 길에 올라오자마자 먼저 다가오는 것은 대나무보다도 바람이었다. 사각거리며 또 버석거리며 촘촘한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은 이 대나무로 뒤덮인 정원을 활공하며 우선 대나무보다 앞자리에 선다.

마치 이곳의 주인은 자신들이 아니고 사람들은 더욱 아니며 대나무임을 알리듯이. 덕분에 대나무는 이곳에서 가장 큰 휴식을 취하고 서로 의지해 마음 놓고 거대한 숲을 이루어 놓았다.

그저 조금씩 흔들리며 바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대나무, 죽녹원에서 힐링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대나무일 것이다.

죽녹원에는 역시 많은 누정이 있다. 걷다보면 죽향정과 의향정이 보이고 명옥헌과 우송당이 조용하게 자리했다.

광풍각과 청죽헌 그리고 예향정과 담양향교까지, 이 누정과 건물들은 죽녹원이 오로지 대나무 한 가지에 치우칠 뻔함에 균형을 맞추는 죽녹원의 배려이자 절대적인 기품들이다.

누각의 지붕이 서늘한 곡선을 그려 하늘과 만나고 또 그 하늘을 배경삼아 공간에 떠오를 때, 그때 진정한 한국의 미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한국적인 곡선의 미는 조선 여인의 눈매와 버선과 한복의 부드러운 선의 떨어짐 그리고 정자와 사찰의 유려한 곡선에 있음이다. 천천히 대숲 길을 걷는다.

사람들은 마치 미술관에 들어온 것처럼 조용하게 걸음을 옮기며 말소리를 낮추었다. 어린 연인은 도심에서의 만남을 피한 채 정자 끄트머리에 앉아 지나가는 바람을 잡아 서로에게 속삭였다. 바람이 대나무 숲에게 전하는 말, 이곳에서 그것은 시가 되었다.

관방제림

관방제림은 일부러 이른 시간에 찾았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오후 나절은 호젓함과는 정반대의 시간이라서 도심 속에서 나무 사이를 걷기에는 확실히 적합하지 않았다. 마침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지만 도착하고 나니 운무는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

아쉬웠지만 천천히 걷기 시작해 보았다. 아침 공기 중에는 서서히 땅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대지의 첫 움직임이 섞이게 마련이다. 혼자 욕심이겠지만 그 엄숙한 하루의 첫 움직임을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관방제림은 영산강 상류 지역인 담양천에 걸쳐 있는 2km 남짓한 제방 숲으로 천연기념물 제 366호다.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선시대 관에서 조성했기에 제방을 따라 줄지어선 나무숲과 함께 관방제림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나무들은 느티나무와 푸조나무, 팽나무와 음나무 등 낙엽성 활엽수 170여 그루로 이곳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소품들이다. 관방제림의 첫 인상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제방 위에 난 길을 걷는다는 느낌뿐이었다. 하지만 직선이었던 길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기기묘묘한 자태의 나무들이 시야에 머물면서 이 길이 어쩌면 죽녹원보다 더 이른바 길에 더 충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들은 제각각 이리 휘어지고 저리 기울었다. 하늘 쪽으로 뻗어나간 가지도 있었고 수평으로 자라난 가지도 있었다. 뿌리는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저 밑에서 이들을 지탱할 뿐이다. 이 길은 그런 주변의 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안고 묵묵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길이 자연과 함께 하지 못할 때 그 길은 그저 땅에 머문다. 길은 나무와 여기저기 비죽이 솟아난 작은 돌 그리고 휘파람새가 지저귀며 바탕을 깔아주며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산책, 그 홀로 걸음의 절정은 이곳에서 완성된다. 

<담양의 대표 먹거리>

담양 음식은 여느 전라도 음식처럼 간이 센 편은 아니다. 그래서 심심할 정도로 맛이 깔끔하다. 음식이란 보기에 화려하면 얼핏 장황해질 수도 있기에 양과 맛 그리고 멋을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담양의 먹거리들은 대체적으로 소박하고 과하지 않다. 선비들의 음식 문화가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온 탓일 게다.

대통밥

   
 
대나무의 고장답게 대나무 통에 지어낸 밥이 유명하다. 한지에 덮여 정성스럽게 나오는 죽통밥에는 남도의 쌀에 은행, 대추, 밤 등이 함께해 건강식으로도 좋다. 대나무의 죽력과 죽황이 밥에 배어들면 몸속의 화와 열을 식히는 역할을 하여 기력을 보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숯불 돼지갈비

담양 떡갈비가 유명세를 타기 전부터 숯불 돼지갈비는 담양 사람들이 즐겨 먹는 대표 음식이었다. 향긋한 숯불 향에 달달한 양념을 그대로 간직한 돼지갈비는 다 구워져 나오는 것이 특징으로 식감이 좋고 숯불에 직화되어 나오기 때문에 기름기가 적다.

 

죽순회무침

살짝 데친 죽순을 미나리와 쪽파에 버무려 초고추장으로 무친 담양의 향토 음식이다. 죽순은 대나무의 어린 줄기로써 봄철 비가 온 직후에 솟아오른 순을 최고로 친다.
예전에는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던 귀한 음식이었다. 쌉싸름하지만 달콤한 맛이다

창평국밥

창평 인근에는 예전에 도축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온 신선한 돼지 부산물로 끓여낸 투박하지만 든든한 국밥이 서서히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창평의 명물 창평국밥이다. 들어가는 내용물에 따라 모듬국밥, 머리국밥, 내장국밥, 순대국밥으로 나뉜다. 

국수

죽녹원 앞에는 국수 거리가 늘어서 있다. 그렇다고 타 지역처럼 대단위로 조성된 곳은 아니다. 시원하고 담백한 멸치국수에 소박한 고명들. 슴슴한 국물 맛에 같이 내어주는 전라도 김치까지 한정식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삶은 약계란과 비빔국수 또한 인기다.

<프리랜서 이곤 기자>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