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시스>

유가 폭락에 대처 못한 데다 정치마저 혼란
식품·약품 등 생필품 부족에 인플레도 기승

[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베네수엘라는 원유 매장량 세계 1위이면서도 국제유가 폭락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경제운용에 실패한 데다 정치마저 혼란을 거듭하면서 현재 나라가 완전히 거덜 난 상태다. 외신은 이 나라에서 거의 모든 것이 바닥을 드러내가고 있다고 전한다. 식품, 의약품, 전력, 화장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콘돔까지 다 떨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외부 세계도 이 나라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 지난 5월 말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와 남미 최대 항공사 라탐이 경제 위기를 들어 조만간 베네수엘라 취항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베네수엘라로 들어갈 승객도 그곳에서 나올 승객도 적어 항공기를 투입할 여건이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라 전역에 만연한 물품 부족 현상과 서둘러 빠져나가는 외국 기업들은 ‘위기의 베네수엘라’를 반영한다. 베네수엘라 상공회의소의 리카르도 쿠산노 부회장은 “모든 것이 일정 정도 부족하다”면서 베네수엘라 기업의 85%가 조업을 중단하거나 단축했다고 미국 CNN 방송에 밝혔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극심한 불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유를 깔고 앉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 나라는 지난 2년 사이 심지어 유가가 반 토막 나는 가운데도 방만한 정부 지출을 삭감하지 않았다.

물자부족에 시달리다
약탈하는 사람들 증가

남미의 주요 산유국 베네수엘라는 유가폭락 때문에 정치격변을 경험했다. 고(故)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생전에 이 나라의 풍부한 석유수입을 이용해 빈곤층에 후한 복지를 제공하고 우방국인 쿠바·니카라과·볼리비아에 후원금까지 주면서 인기를 누렸다. 2013년 그가 죽은 뒤 선출된 니콜라스 마두로도 차베스처럼 대중영합적인 정치를 펼치려 했지만 이번에는 저유가에 발목을 잡혔다. 그러자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대중의 불만에 편승한 중도우파 정당이 의회 내 다수를 차지했다. 의회를 장악한 야권연대 민주연합회의(MUD)는 마두로 대통령을 올해 상반기 내에 축출하겠다고 공언해 놓고 있는 상태다. 현재 베네수엘라 의회에서 야당은 전체 의석 164석 중 109석을 차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2015년 인플레율은 180.9%였다. 그 해 이 나라 경제는 최소 5.7% 뒷걸음쳤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월 베네수엘라 인플레가 2016년 725%에 이를 수 있다고 예측했다. 경제가 붕괴된 데다 달러 등 경화(硬貨)가 없어 수입을 하지 못해 식품·의약품 등 필수품 부족 현상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그러자 최근에는 약탈이 부쩍 늘었다. 폭도들은 밀가루, 닭고기, 그리고 심지어 속옷까지 훔친다고 외신은 보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한밤중에 일어나 슈퍼마켓 앞에서 몇 시간씩 길게 줄을 선다. 하지만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결국 빈손으로 돌아서고 암시장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가뜩이나 세계에서 가장 폭력이 만연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베네수엘라에서 약탈까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공식 집계는 없지만 인권단체 ‘베네수엘라 사회적 충돌 관측소’는 지난 1분기에 107건의 약탈 또는 약탈 시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가게에 침입하거나 제품을 실은 트럭을 덮치는 군중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은 소셜미디어에 단골로 등장한다.

얼마 전 타치라 주(州)에서 부엌용 두루마리 키친타월, 소금, 샴푸를 싣고 달리던 트럭이 전복돼 화물 일부가 쏟아져 나오자 군중 수백 명이 그 트럭을 약탈했다. 현지 시민보호 담당 관리 루이스 카스트리온은 이 과정에서 군중을 제지하려던 보안 관리 6명을 포함해 15명이 다쳤다고 말했다. 목격자 마누엘 카르데나스는 “큰 소동이 있었다. 공포탄이 발사됐고 최루탄도 쏘았다”고 외신에 말했다. 이 사건이 있었던 날, 두건을 쓰고 오토바이를 탄 한 무리의 폭도가 안데스 산맥의 메리다 주(州) 근처의 창고로 운송 중이던 밀가루 650 포대를 훔치려 시도했다. 보안요원들이 그 절도를 겨우 막았지만 국가경비대원 2명과 경찰관 4명이 난투 과정에서 다쳤다고 현지 보안 관리는 말했다. 앞서 메리다 주에서는 약탈자들이 닭고기가 보관돼 있다고 들은 한 국영 슈퍼마켓에 난입해 식품, 선반, 심지어 문짝까지 훔쳤다. 그 전 날 같은 주의 속옷 가게도 털렸다.

집권당 관리들은 약탈자들을 가리켜 물건을 되팔아 돈을 벌려는 범죄자이자 밀수꾼이라고 비난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폭력 엄단을 다짐했으며, 디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의 정적들이 호세프를 직무 정지시킨 것처럼 그의 정적들이 그를 노려 ‘쿠데타’를 꾀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마두로에 반대하는 세력은 굶주림과 절박함이 베네수엘라 국민들을 도둑질로 내몰고 있다고 반박하며 수입과 생산을 방해한 엄격한 화폐·물가 통제의 완화와 같은 긴급한 정책 변화가 없다면 상황은 악화되기만 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연금생활자에게 인플레 영향
안 받는 상품권 지급…무슨 일

나라 전체가 물자 부족에 시달리다 보니 베네수엘라 슈퍼마켓의 상품 진열대는 채워진 부분보다 텅 빈 부분이 더 많은 실정이다. 그나마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 가게에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극심한 인플레 때문에 자고 나면 물건 값이 껑충 뛴다. 이 바람에 특히 연금 생활자들이 고통을 겪어 왔다. 그러자 베네수엘라 의회가 얼마 전 연금 생활자와 은퇴자가 180%라는 기록적인 인플레를 떼어내고 식품과 의약품 값을 지불하도록 각종 편법을 담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목적은 다수의 연금을 단일화하고, 공공·민간 분야 은퇴자들의 연금사용 계획을 따르도록 만듦으로써 연금지급 과정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연금 지급은 지급 주체의 선택에 따라 할인권, 상품권, 전자카드, 현금 또는 현금에 상당하는 것의 형태로 이뤄진다. 정식 명칭이 ‘은퇴자와 연금 생활자를 위한 식품 및 의약품 용 채권 법’인 이 법안은 의회에서 토론 없이 신속하게 통과됐다. MUD 소속 마구엘 피자로 의원은 법안 통과에 즈음해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것과 같은 법률들을 위해 우리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것이며 이 국회는 우리가 겪는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라고 구성된 것”이라면서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인들의 손에 도구를 쥐어준다. 이 법률은 국가가 투표로 이룬 변화”라고 말했다. 나라는 결딴났지만 최소한 노인만은 보호하겠다는 의원들의 성의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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