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공식 수교 앞두고 난항

신동원 차관, 헝가리서 막판 교섭
 
동원 신, 나랑 잠시 갈 곳이 있습니다
 
19881228일 밤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정부 영빈관 숙소.
 
헝가리 방문 이틀째의 숨 가쁜 일정을 마무리하고 한숨 돌리려던 당시 신동원(83) 외무차관은 호른 줄라 헝가리 외무차관의 느닷없는 방문에 당황했다. 신 차관이 무작정 자신을 따라오라는 줄라 차관을 따라 도착한 곳은 그로스 공산당 서기장의 관저였다. 예상치 못했던 심야 예방이었다. 그는 헝가리 최고 실력자인 그로스 서기장과 마주한 순간 헝가리와 공식 수교를 맺는 일이 순조롭게 완료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198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한 북방외교의 시초인 한·헝가리 공식 수교를 위한 최종 작업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푸른 다뉴브강을 넘기 위한 담판
 
신 차관이 헝가리를 방문하기 석 달 전인 1988913일 양국 정부는 서울과 부다페스트에 상주 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상주대표부 설치를 이끌어내기까지 ‘6공 황태자라 불리던 당시 박철언(73) 청와대 정책보좌관(변호사·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이 작전명 푸른 다뉴브강아래 극비리 서울과 부다페스트를 오간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우리 정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헝가리와의 공식 수교를 서둘러 마무리짓고 싶어했다.
 
하지만 북한(北韓)이 강하게 반발하는 데다가 국내적으로도 개혁·개방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헝가리 정부는 한국과의 정식 수교에 부담을 안고 있었다.양국은 이 상황을 넘기고 서로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할 모종의 계기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한 경험이 많은 신 차관이 직접 나섰다.
 
그는 크리스마스인 1225일 헝가리 외무부의 공식 초청장을 지참하고서 비행기에 올랐다. 대외적 목적인 ·헝가리 투자보장협정 체결을 위해 외무부 조약과장까지 동행(同行)했지만 실상은 수교 관계로 발돋움하기 위한 탐색전이었다.
 
신 차관 일행은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27일 정오께 부다페스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 일행을 태운 차량은 어디론가 한참을 내달렸다. 공항에 마중나온 한탁채 초대 헝가리 상주대표부 대표에게 행선지를 물었으나 한 대표도 알지 못했다.
 
아무리 탈()냉전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해도 미수교 공산국가에 들어가는 것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헝가리 주재 북한 대사는 김정일(2011년 사망)의 이복형제인 김평일(60) 주체코북한대사관 대사였다.
 
신 차관 차량이 오후 230분께 도착한 의문의 행선지는 호텔이 아닌 헝가리 외무성 청사였다. 일행이 안내를 받아 들어간 회의실에는 줄라 차관을 비롯한 헝가리 정부 관계자들이 죽 앉아 있었다. 짐을 풀지도 않은 채 1차 회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공산국가 법도는 이런가하고 의아해 하던 신 차관에게 줄라 차관은 헝가리 방문을 환영한다. 그런데 꼭 한국 측에 물어보고 따져볼 일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줄라 차관은 한국 신문들이 최근 며칠 신동원 차관이 정식 수교를 위해 헝가리를 방문한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다면서 양국이 그런 단계까지 가지 않았는데 한국 신문이 그렇게 쓰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일종의 항의성 발언을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다음 웃는 얼굴로 한국 신문을 다 번역해서 봤겠지만 다들 관측통에 의하면이라고 썼지, ‘신 차관이나 한국 외무부에 따르면이라고 쓴 신문이 어디 있느냐면서 자유세계에는 언론(言論)의 자유(自由)’도 있지만 추측의 자유’(freedom of speculation)도 있다고 맞받아쳤다. 기선 제압에 성공한 것이다. 이에 줄라 차관은 웃으며 알겠소라고 말했고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신 전 차관은 헝가리도 우리와 수교할 마음이 있지만 한국 신문이 연일 보도하니 북한과 소련을 의식해 부담스러워 그렇게 나왔던 모양이라고 회고했다.
 
헝가리의 결정적인 답소련도 다 알고 있다
 
신 차관과 줄라 차관은 다음날에도 아침과 점심을 함께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신 차관은 충분히 교감했다고 판단한 뒤 마음에 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우리와 수교하는 것에 대해) 소련 양해를 받았느냐고 슬쩍 떠본 것이다. 이에 줄라 차관은 씩 웃더니 받았다, 받지 않았다는 말 대신 그쪽(소련)에서도 다 알고 있다고 답했다.
 
당시 공산국가의 맹주인 소련이 한·헝가리 수교에 어깃장을 놓지 않을 것임을 확인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가 북방외교의 종결점인 소련과 수교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서도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헝가리의 반응은 즉각 우리 정부에 보고됐다.
 
신 차관은 그날 밤 줄라 차관의 안내로 그로스 서기장까지 만나게 됐다. 그로스 서기장은 이 비밀 회동에서 이제 한국도 헝가리와 우호협력하고 수교하자는 뜻을 밝혔고 신 차관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신 차관은 29일 출국에 앞서 줄라 차관과 함께 프로토콜에 서명했다. “19891월 하순 호른 줄라 헝가리 외무차관이 한국을 공식 방문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실은 서울에서 양국 공식 수교를 공동성명으로 발표하기 위한 방한을 약속한 것이다.
 
양국(兩國)은 줄라 차관이 이듬해 129일 방한한 뒤 21일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같은 일자로 상주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했다. 우리와 공산권 국가의 첫 수교가 이뤄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해 폴란드, 유고슬로비아와 릴레이 수교를 이어갔고 1990년에는 소련과도 수교했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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