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 대선을 하루 앞둔 19871215일 오후 2시 김포공항. 20대 중반의 김현희(일본 가명 하치야 마유미)가 흰색 마스크를 쓰고 호송요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모습은 지금도 국민의 뇌리에 생생히 살아있는 장면이다. 

바레인에서 체포된 지 2주일 만에 이뤄진 KAL기 폭파용의자 김현희의 국내 신병인도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는 결정적 계기였다. 대선을 불과 하루 앞둔 호송시점이 정치적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기는 했으나 당시로서는 용의자의 신병확보 없이 사건의 배후와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언뜻 보기에는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보이는 김현희의 신병인도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숨 막히는 외교전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신병인도에 소극적이었던 바레인 정부를 상대로 가히 전방위적 외교를 동원해 일궈낸 작품이었다는 평가다.
 
바레인 경찰이 현지 공항에서 김현희를 생포한 것은 폭파사건 이틀 후인 121일이었다. 1129일 바그다드에서 대한항공(KAL) 858기에 탑승한 김승일과 김현희는 기내에 시한장치를 한 라디오 폭탄을 두고 아부다비에서 내린 뒤 곧바로 바레인으로 도주해 은신했다. 이어 일본 위조여권을 이용해 로마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으로 달아나려다 현지공항 검색대에서 경찰에 적발된 것이다. 김승일은 체포 직전 독약이 든 앰풀을 깨물어 자살했고 바로 옆의 김현희도 담배에 든 앰풀을 깨물려고 시도하다가 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당시 사건의 배후와 실체를 수사하던 안기부로서는 김현희의 신병확보가 사활적 관건이었다. 결국 김현희를 바레인으로부터 호송해오는 교섭의 책임이 당시 외무부로 넘어왔다.
 
김현희 압송작전의 진실
 
KAL기 폭파사건이 발생한 지 8일이 지난 127, 바레인 출국길에 오른 당시 박수길 외무부 1차관보의 어깨에는 무거운 짐이 놓여 있었다. 앞으로 일주일 후인 1213일까지 김현희의 신병을 국내로 인도해오라는 청와대의 특명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참사의 충격에 휩싸였던 당시 국내 여론도 하루빨리 김현희를 국내로 끌고 오라는 쪽으로 모여 있었다.
 
그러나 박 차관보로서는 당시 바레인 당국이 순순히 신병을 인도해줄지 의문이었다. 바레인이 한국과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한 국가가 아닐뿐더러 김현희가 일본 위조여권을 소지하고 있던 터라 오히려 일본 측에 신병이 인도될 가능성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시리아 등 친북(親北) 사회주의 아랍국가들은 관영언론을 통해 김현희는 가짜다라는 뉴스를 양산하며 바레인 당국을 압박하는 상황이었다.
 
박 차관보는 일단 바레인 공항에 도착한 직후 아이언 핸더슨 CID(형사국) 국장의 도움으로 현지 경찰에 구금된 김현희를 면회했다. 박 차관보가 한국 사람이지, ”, “일본 사람 아니지라고 묻자 김현희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만 숙였다는 후문이다.
 
바레인 도착 다음날인 128일 박 차관보는 먼저 외무장관을 찾아 바레인 정부의 기류를 살폈다. 정부가 바레인 측에 신병인도를 요청할 수 있는 공식 근거는 헤이그 협약’(항공기 불법탈취 방지에 관한 조약)이었다. 하이재킹당한 항공기의 등록국 등이 재판권을 행사하며, 용의자의 신병을 확보한 국가는 관할국에 신병을 인도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박 차관보는 이 같은 법률적 접근에 더해 보다 현실적 이유를 내세워 바레인 정부를 설득했다. 바레인이 테러리스트 김현희를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은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논리였다. 특히 북한 측이 특공대를 보내어 또 다른 테러를 자행할지 모른다며 강하게 압박했다.
 
바레인 소행 분명한 증거가 없다
 
예상대로 바레인 측은 흔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북한이 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신병인도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바레인 외무장관은 박 차관보에게 원칙적으로 김현희를 보내주도록 적극 협조하겠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면 안된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박 차관보는 동행한 안기부 직원들과 함께 대책을 숙의했고 그 결과 결정적 증거를 찾아냈다. 바로 독약 앰풀이었다. 김현희가 자살기도에 사용했던 독약앰풀이 과거 서울에서 체포된 간첩이 썼던 것과 같은 종류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료를 확보한 것이다. 두 케이스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문제의 독약은 사이나이다 종()으로 북한 외에는 생산하는 국가가 없었다.
 
박 차관보는 이튿날인 9일 다시 외무장관을 만나 증거자료를 제시하면서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빨리 송환하라고 설득했다. 외무장관에 이어 다음 교섭대상은 현지 경찰을 관할하고 있는 모하마드 칼리파 내무장관이었다. 박 차관보는 증거가 다 나왔다면서 구체적인 신병인도 절차에 착수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바레인 측도 북한의 소행임을 인정하는 눈치였으나 그다지 서두르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자 박 차관보는 1213일이 시한이라는 점을 밝히며 바레인 정부의 조기 결단을 압박했다. 박 차관보는 칼리파 내무장관에게 “13일까지 돌아오라는 게 본부의 훈령이라면서 선거 등으로 일정이 바빠 13일까지 김현희를 내주지 않으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한국 정부는 물론 바레인 정부도 어려워지니까 화약고를 빨리 털어버려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박 차관보의 외교적 노력은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제임스 릴리의 비망록인 차이나 핸즈(China Hands)’에도 잘 소개돼 있다. 비망록에는 박 차관보는 바레인 측에 테러용의자를 오랫동안 데리고 있으면 그만큼 북한이 그녀를 구출하려는 공작을 펼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바레인 사람들이 살해될 우려가 있다고 설득했다고 돼 있다.
 
대한항공 호송특별기 유럽으로 위장
 
이에 부담을 느낀 바레인 정부는 결국 김현희의 신병을 인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칼리파 내무장관은 각의에서 결정해 국왕에게 보고해서 돌려보내주겠다면서 절차를 밟아야 하는 만큼 14일쯤 신병을 인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양국은 철통보안 속에서 신병인도 실무협상을 벌였다. 수차례 교섭 끝에 양측은 대한항공 특별기가 14(현지시각) 저녁 7시 도착해 1시간 동안 급유한 뒤 김현희를 싣고 한국으로 떠난다는 계획에 합의했다. 박 차관보는 즉각 본부에 보고했고 정부는 곧바로 대한항공의 협조를 얻어 특별기를 출동 대기시켰다. 문제는 안전이었다. 대한항공이 공개적으로 바레인행 특별기를 띄울 경우 북한의 테러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따라 양측은 항공기와 공항 관제탑간 교신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작전을 세웠다. 유럽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바레인 상공을 이동하던 중 갑자기 생명이 위독한 환자가 생겨 긴급히 바레인 공항에 비상 착륙하는 것으로 가장하기로 한 것이다. 쉽게 말해 페인트 모션을 쓰기로 한 셈이다. 사전계획 유출을 우려해 심지어 바레인 공항당국에도 이를 알리지 않았다. 이제 실행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양국은 당초 계획을 24시간 연장해 실행에 옮겼다. 대한항공 특별기는 15일 오후 7시에 도착했고 1시간 동안 급유를 받는 동안 김현희를 태웠다. 당시 특별기에는 안기부에서 급파된 남녀 요원과 외교관 두명이 동승했다. 안기부 요원들은 김현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만일의 자살 가능성에 대비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박 차관보는 서울까지 9시간 걸리는데, 재갈을 물릴 필요가 있느냐고 하자 요원들은 안 된다. 혀를 깨물어 자살할 수 있다고 손사래를 쳤다. 김현희를 태운 비행기는 한국 시각으로 15일 오후 2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8일간에 걸친 마유미 호송작전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박 차관보는 언론 노출을 우려해 특별기가 떠난 다음날인 16일 캐세이퍼시픽 항공을 이용해 귀국했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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