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시스>

“조 대사, 결국 안보리에 안 가기로 했습니다. 백악관으로부터 한국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훈령이 내려왔습니다.” 오스트리아 빈 주재 조지 글라스 미국 대사 대리가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가 열리기 불과 1시간 전인 오전 9시께 조창범 주(駐)오스트리아 대사에게 황급히 알려왔다. 한국의 핵개발 의혹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지 않기로 했다는 워싱턴의 최종 통보였다.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간밤을 지새우다시피한 조 대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사회의 공식논의 절차를 앞두고 있었지만 안보리 행(行)을 집요하게 주장하던 ‘슈퍼파워’ 미국이 막판에 고집을 꺾으면서 상황은 사실상 종료된 것이었다. 지난 수개월간 ‘저주의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한국의 핵개발 파동이 고비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2004년 11월 25일의 일이다. 2004년 하반기 세계 외교가를 강타한 이른바 ‘남핵(南核)’ 파동은 한국에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과학자들의 순수한 호기심이 빚어낸 ‘해프닝’이라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고 심지어 혈맹(血盟)인 미국과 전통우방국들이 안보리 회부를 주도하고 나서면서 한국을 막다른 코너로 밀어 넣었다.

북핵(北核)이라는 풀리지 않는 화두를 놓고 악전고투하던 한국으로서는 내부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맞닥뜨린 셈이다. 정부가 남핵 파동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외교적 대응을 시도한 것은 2004년 8월 초였다. 조 대사가 외교부 본부 당국자로부터 ‘비화기’(秘話機·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제작된 통신기기) 전화를 받은 것이 이때쯤이었다. 극비의 보안을 요구하는 사안에 한해 비화기가 사용된다는 점에서 조 대사는 순간적으로 ‘중대사안’임을 눈치챘다.

문제는 IAEA의 추가의정서에 따른 신고였다. 우리 정부는 2004년 2월 19일 추가의정서를 비준했고, 그로부터 6개월 내인 8월 19일까지 국내 핵시설 및 핵물질에 관한 신고서를 새로이 IAEA에 제출해야 했다. 원자력연구소의 핵물질 추출 실험 역시 신고 대상이었다. 실험 자체를 ‘비밀'에 부쳤던 과학자들은 신고시한이 다가오자 당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외교부로 달려왔다. 우라늄 농축 핵물질실험이라는 사안의 민감한 성격상 뒤늦은 신고 탓에 국제사회의 오해를 살 수 있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조 대사가 본부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은 일단 원자력연구원의 박모 핵연료연구단장과 연구원 한 명이 곧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니 상세한 내용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철저한 보안 하에 박 단장을 대사관저에서 만나 정확한 경위를 청취한 조 대사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절감했다. 신고서를 제출받는 IAEA 쪽에 얘기해서 ‘문제없이 넘어가도록’ 외교적 교섭을 시도해보라는 게 본부의 지령이었기 때문이다.

조 대사는 ‘숨기면 커진다’는 판단 하에 철저한 투명성으로 대응할 것을 본부에 건의하고 곧장 이튿날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을 찾았다. 시쳇말로 ‘자수해서 광명 찾자’는 생각으로 모든 경위를 투명하게 설명하고 조사 과정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였다. 만약 11월에 열리는 IAEA 이사회가 한국의 케이스를 안전조치 협정의 의무 불이행으로 규정하면 이 사건은 유엔 안보리에 회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는 과학자들이 호기심에서 핵물질 추출 실험을 한 사실이 제때 IAEA에 보고되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이는 안전조치 협정 위반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보고 실패’ 또는 ‘보고 지연’이며 핵확산 우려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논리를 설파했다. 또한 한국 정부가 그 사실을 파악함과 동시에 IAEA에 자진 신고하고 시정조치를 취했으며 조사 과정에도 적극 협조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캐나다·호주·영국·프랑스 등 이른바 ‘핵 비확산’ 주창 국가들은 우방이라고 ‘이중잣대’를 적용할 수 없으며 ‘결백 입증’을 위해서라도 유엔 안보리로 넘겨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특히 IAEA 이사국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존 볼턴 국무부 군축·국제안보담당 차관이 “한국의 핵물질 실험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이는 국제사회의 핵 비확산을 다루는 미국 정부의 공정성을 부각시키는 한편 “남·북한에 ‘이중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북한의 항의를 피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반기문 외교부 장관도 각종 정상회담이나 외교장관 회담이 있을 때마다 실험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또 국제사회의 의혹 확대 차단을 위해 ‘평화적 핵이용 4원칙’을 천명하기도 했다. 코너에 몰린 한국에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와 수교 관계조차 없는 국가도 포함된 제3세계 비동맹운동(NAM) 국가들이었다. 당시 투표권이 있는 IAEA의 34개 이사국 가운데 14개국이 NAM 국가였다. 정부는 이들 국가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 다른 이사국들을 설득하고 만약의 경우 이사회 표 대결에도 대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IAEA 이사회를 일주일 남겨둔 11월 17일 열린 NAM 자체 회의는 우리에게 불리한 흐름을 뒤집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조 대사가 회의장을 찾아 핵물질 추출 실험의 근본성격과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하자 회원국들이 이에 수긍한 것이다. NAM 국가들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자체가 강대국의 논리에 따른 차별적 조약이라는 불만을 갖고 평화적 핵활동이 제약받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해 오던 터라 한국의 입장에 적극 동조했다.

이후 호주와 일본 등 안보리행을 주장하던 다른 국가들도 속속 입장을 선회했고, ‘대세’를 읽은 미국도 결국 자국 내 강경 입장을 누르고 이사회날 아침인 11월 25일 ‘안보리 회부 반대'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당초 안보리 회부를 주장했던 프랑스는 IAEA 이사회에서 아예 공식발언을 하지 않았다.

남핵 파동이 가져온 외교적 교훈은 “한국은 이제 강대국 힘의 정치에 휘둘리던 변방국가가 아니라 세계사의 중심부 일원으로 당당한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국익을 관철해 낼 수 있다”는 외교적 자신감이다. 또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이익만이 있을 뿐이다”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수상을 두 차례 역임한 파머스톤(Henry John Palmerston) 경의 지적대로 국제사회는 자국 이익과 힘의 논리에 따라 얼마든지 관계가 뒤바뀔 수 있는 ‘정글’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는 지금 이 순간 전세계 외교의 최전선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매우 ‘불편한 진실’이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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