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주도 공산군 만주 집결 첩보 입수…10만 병력·공군기 3백여대 戰力 판단

미 합참, 확증없어 당황… “참전해도 모른척해야 미국 유리”

미국은 한국전 중반 이미 전선에 투입된 병력외에 소련 주도하에 북한과 중공도 동참하는 9개국 공산 연합군이 따로 결성돼 만주에 집결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대책 마련에 부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美) 합참은 1951년 8월 극동군사령부로부터 10만여 지상군과 공군기 3백대 이상으로 무장한 공산 연합군이 결성돼 참전할 전망이라는 보고를 받았으나 확증을 잡지 못해 당황했던 것으로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들이 전했다.

당시 소련의 개입 여부에 크게 신경을 쓰던 미국에게는 50년 10월 발생한 한국전 참전 미 공군기의 소련 오폭에 뒤이어 공산 연합군 결성 첩보가 입수됐다는 점에서도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미 합참 전략조사위가 51년 8월 20일 합참의장에게 제출한 ‘국제 의용군의 한국전 개입’ 제하의 극비 보고서는 공산 연합군의 규모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지적했다. 파병국만도 소련, 중공 및 북한과 함께 몽고, 동독, 폴란드, 체코, 헝가리 및 루마니아 등 모두 9개국인 것으로 추정했다.

지상군의 경우 중공이 약 6만 5천명을, 북한은 2만여명을 차출했으며 소련이 기계화, 보병 및 방공 사단 각 1개씩 등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건 소련 보병 사단의 경우 “일본계(系)”로 구성됐다고 덧붙여져 있는 점이다.

이밖에 ▲몽고가 기병 1개 사단 ▲동독은 탱크, 보병 및 포병 연대 각 1개씩 ▲폴란드는 기갑 보병 1개 연대 ▲체코의 경우 포병 1개 연대를 보낸 것으로 판단됐다. 또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의료 부대를 차출한 것으로 지적됐다.

미 합참은 공산 연합군의 공군력도 크게 우려했다. 보고서는 제트기의 경우 중공이 2개 비행 사단을, 소련은 1개 비행 사단과 2개 비행 연대를 차출한 것으로 판단했다. 주력 전투기만도 어림잡아 3백여대 규모였던 셈이다.

여기에 ▲중공이 2개 폭격 연대를 포함한 5개 비행 연대 ▲북한은 지상 공격용 1개 항공 연대 ▲몽고의 경우 1개 항공 연대를 기여한 것으로 판단됐다. 보고서는 또 동독과 체코의 경우 조종사를 파견한 것으로 덧붙였다.

미 합참은 그러나 공산 연합군이 만주에서 훈련중임을 뒷받침하는 확증을 잡지 못해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공산 연합군의 의미를 격하시키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보고서의 해당 대목은 이렇다.

“…소련권의 ‘의용군’이 결성됐다는 확고한 증거는 없다…그러나 공산 연합군이 한국전에 투입된다고 해도 이를 뒷받침할 군수 지원의 한계 등 때문에 실제 전투력보다는 정치·심리적인 의미가 크지 않겠느냐는 판단이다…”

보고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무장된 소련권 또는 일본계 병력이 대거 한국전에 투입될 가능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미 국가안보회의(NSC)에서도 당시 공산 연합군 문제가 다뤄졌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합참과 NSC의 접근 방법은 다소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합참 보고서에 이렇게 돼있다.

“NSC 보고서(NSC 48/5)는 공산 연합군의 한국전 개입 결의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적절한 지침을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미국은 결의 그 자체를 전쟁 행위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융통성있게) 대처해야 한다.”

그러면서 “확증이 없는 현상황에서 공산 연합군 문제와 관련해 소련에 먼저 경고를 가해서는 안된다…소련이 정작 한국전에 참전할 경우 유엔군을 재편하는데 어려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흥미있는 대목은 그 다음이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판단은 이렇다. 공산 연합군이 조만간 참전하더라도 미국이 (당분간 이를 모르는체 하며)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실질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시간을 벌 수가 있다.”

보고서는 또 “…공산 연합군이 이미 한국 전선에 투입됐는지도 모른다…”느니 “소련이 그들의 참전을 눈가림 하려고 쇼를 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 합참이 당시 공산 연합군 문제로 혼선을 빚고 있었음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50년 10월 미기(美機)들 소련 오폭 소동

미국은 50년 10월 8일 발생한 소련 오폭 사건 때문에도 곤욕을 치렀다. 50년 10월 16일자 미 합참 극비 문서(JCS 2161/3)에 언급된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미 5공군 소속 F-80 전폭기 2대가 50년 10월 8일 오후 3시께 청진을 공격하기 위해 대구 K-2 기지를 이륙했다…조종사들은 목표 지점 상공으로 판단되는 곳에 이르러 구름을 뚫고 3천 5백피트 상공까지 하강해 비행장을 공격했다. 조종사들은 적기 2대 이상이 파괴된 것을 확인하고는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이들은 그때야 현지 지형물이 명령받은 작전 목표와 다른 것을 알아 차렸다…”

미군기들은 당시 청진을 훨씬 벗어나 소련 국경을 무려 1백km나 뚫고 들어가 스카야 레흐카 근처의 소련 공군 기지를 잘못 폭격했던 것이다.

소련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주소미(駐蘇美) 대사가 모스크바 시간으로 50년 10월 10일 새벽 2시 미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극비 전문이 당시의 긴박감을 생생히 전한다.

“…그로미코(소련 외무장관)가 밤 11시 45분 급히 만나자고 연락했다. 그러나 본인은 감기 때문에 응할 수가 없었다. 바부어가 대신 나갔다…그로미코는 미군기(機)가 소련을 공격했다고 엄중 항의하면서 책임지라고 했다…우리는 진상을 잘 모른다며 발뺌할 수 밖에 없었다…”

미 공군은 이후 오폭의 책임을 물어 해당 전폭기 전대장(戰隊長)인 대령을 직위 해제하고 조종사 2명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미국 문서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오폭 사건은 미소(美蘇)간에 더 이상 비화되지 않고 원만히 타결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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