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던 동생, 감금·폭행하며 북한 납치 시도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탈북자에서 여간첩으로 그리고 평범한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원정화 씨가 중국 연길에서 수일간 감금된 상태서 납치를 당할 뻔한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예상된다. 원 씨는 지난 2001년 우리나라에 탈북자 신분으로 들어와 신분을 숨긴 채 간첩 활동을 펼치다 발각돼 2008년 구속됐다. 5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평범한 국민으로 살고 있던 원 씨는 최근 중국 연길에 갔다가 잊을 수 없는 사건을 겪고 말았다. 일요서울에서는 원정화 씨의 납치미수·감금 사건 전말을 파헤쳐 봤다.    

‘간첩 활동은 국정원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는 각서 강요
핸드폰 등 압수하고 자신의 집에 감금하며 식칼로 위협하기도

지난 9월 2일 금요일 오후 3시 반, 원정화 씨는 중국 연길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월 29일경 연길에 있는 이복여동생 김모씨로부터 “내가 갑상선암에 걸렸다. 하루 빨리 언니가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중국 비자를 신청해 비행기표를 샀다. 그것도 왕복이 아닌 편도였다. 원 씨는 “여동생이 너무 급하게 들어와 달라고 했다. 돌아가는 표는 따로 끊어 준다고 해 편도항공권만 구매해 들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이때까지 원 씨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실상 감금생활
감옥생활 등 거짓말

연길에 도착한 원 씨는 이복동생 김 씨와 저녁을 먹은 후 동생의 아파트로 이동했다. 김 씨의 아파트는 하남가 창성시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아파트 상태가 깨끗해 우리나라의 고급스런 아파트와 비슷했다. 이곳 4층에 위치한 동생 집에 들어간 원씨는 7일 한국으로 귀국하기까지 단 2번의 외출만 했을 뿐 사실상 감금생활을 했다.

이복여동생 김 씨는 원래 북한에 있었다. 원 씨의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한 가족이 됐다. 하지만 원 씨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한국으로 넘어오며 굴곡진 인생을 살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동생과의 연락도 끊겼던 터였다.

그러던 동생에게서 2014년 전화가 왔다. 언니의 남한 내 간첩활동이 발각돼 구속된 게 북한에 알려지면서 자신도 감옥에 끌려갔다가 겨우 연길로 도망쳐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이 어려우니 돈을 좀 보내 줄 수 있냐며 전화가 왔던 것이다. 

원 씨는 출소 뒤 일을 해 모아뒀던 약 300만 원 정도의 돈을 연길에 있는 동생에게 송금해 줬다. 당시 동생은 북한에 있는 원 씨 모친의 유언이 담긴 녹취록도 들려주겠다며 연락을 해 왔다. 

하지만 원 씨는 북한에 어머니가 잘 살고 있고 동생이 감옥에 갔던 것이 자신 때문이 아닌 동생 개인적인 문제였다는 사실을 추후에 알았다. 원 씨는 동생의 거짓말을 알게 됐고 관계가 소원해 졌다. 그렇게 1년여간 연락 없이 지내던 동생이 갑자기 암에 걸렸다며 연락해 왔다. 안타까운 마음에 동생을 보러간 원씨는 자칫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두만강 물 불어나
북한 납치 실패

원 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이복동생 김 씨는 갑자기 돌변했다. 원 씨의 핸드폰과 가방 등을 빼앗고 집안일과 청소 등을 시키며 집 안에만 머물게 했다. 또 원 씨에게 “너는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해라. 안 그러면 죽일 수도 있다.”며 남편 김모씨와 함께 협박했다. 동생의 남편은 중국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원 씨는 “너무 황당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단 2번의 외출도 반찬거리를 사러 나갔던 게 전부였다. 보안카드가 없으면 외출을 할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아파트 시스템 탓에 원 씨는 밖으로 도망갈 엄두도내지 못했다. 

하루는 동생 부부가 마사지나 받고 오겠다며 나간 뒤 새벽에야 들어왔다. 동생 부부의 행동이 수상하던 차에 우연히 둘의 대화를 들은 원 씨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저 간나새끼 어떻게 넘기지? 재수없네. 산 채로 넘겨야 하는 거 아냐?” “오빠, 조선에다 다시 연락하고 날짜 잡고 다른 곳으로 아지트 옮기자” 그들은 원 씨를 납치해 북한으로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 마사지방에 간 것이 아니라 원 씨를 북한에 넘기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루트 중 하나인 남평지역을 둘러보고 온 것이다. 남평은 두만강과 연결돼 있어 북한사람들과 조선족들이 중국을 드나들 때 주로 이용하는 곳이다. 문제는 이 두만강이 최근 알려진 것처럼 북한 대홍수로 인해 당시부터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들은 원 씨 납치 날짜를 다시 잡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동생 부부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던 원 씨는 “너무나 황당했지만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 없었다”고 말했다.  

동생 김 씨는 원 씨 감금 5일째인 6일, 원 씨에게 “너는 나하고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냥 죽어야겠다. 이제부터 내가 부르는 대로 써.”라며 각서 쓸 것을 강요했다. 각서 내용은 동생 김 씨의 성장과정, 신분 등에 대한 거짓내용과 원 씨가 남한에서 간첩으로 활동했던 것은 사실이 아니며 이 자백은 국정원과 정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원 씨가 각서를 쓸 수 없다고 버티자 동생은 지속적으로 폭언을 퍼부었다. 원 씨가 끝까지 각서 쓰기를 거부하자 동생도 포기한 듯 잠이나 자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원 씨도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 5시경 동생이 일어나라며 깨우더니 나가야 하니 씻고 나오라고 했다. 원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씻고 나와 화장대에 앉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엇인가가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원 씨는 “당시 뒤를 바라보니 동생이 커다란 박스테이프 뭉치로 내 머리를 내려쳤다. 그러고는 수건으로 내 목을 졸랐다. 나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생의 남편이 들어와 내 머리채를 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마구 가격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동생 행동 이해 안 돼
 한국행 고려한 듯“

동생 부부에게 제압당해 손목에 테이프가 감긴 채 꿇어 앉힌 원 씨는 이번에는 식칼로 위협을 당했다. “너는 이미 한국에서 신용을 잃었다. 동생을 위해 각서 하나 못 써 주냐?”며 지속적으로 각서를 쓸 것을 종용했다. 원 씨는 “나에게 협박을 하는 동안 여동생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지시를 받는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의붓아버지 김모씨였다.”며 “나에게 이런 일을 저지르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고 말했다.  

원 씨는 식칼로 자신을 협박한 동생 남편 김 씨에게 “연길에서는 신고를 못해도 한국에서는 반드시 신고할 거다. 한국에 누나가 있어 한국을 드나드는 걸로 아는데 이러지 말라.”고 말하자 순간 멈칫한 기색이 보였다고 전했다.  

원 씨는 “동생이 도대체 자신을 왜 납치하려 했는지 또 각서를 강요했는지 알 수가 없다.”며 “아마 동생도 한국으로 들어오려는 것 같은데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면 될 것을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동생 부부는 결국 7일 오전 원 씨를 풀어줬다. 각서를 써 줄 기미도 없고 한국으로 돌려보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한국에 있는 담당경찰관이 원 씨가 언제 몇 시에 귀국하는지를 묻는 전화가 수시로 오자 동생부부의 생각이 변한 것 같다. 당시 동생은 원 씨 핸드폰으로 담당 경찰관이 전화가 오자 “제가 보낼게요” “약속 지킬게요” 등 전화 응대를 했다.

하지만 원 씨는 비행기에 타는 순간까지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하면서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다. 결국 원 씨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실신했고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귀국했다. 원 씨는 한국에서 경추염죄, 뇌진탕 등 전치 3주 진단을 받아 치료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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