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美, 50년 말 쿠바 파병 제의 수락…군용기도 보내진 듯

대만과 쿠바가 한국전(韓國戰)에 참전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1994년 말 공개된 미(美) 합참 극비 문서는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1952년 8월 시점에서 국부군 요원을 한국 전선에 파견하고 있었던 것으로 강력히 시사했다. 이와 관련해 최대 1천5백여명의 국부군 심리전 요원이 한·미·대만 3국 간 밀약에 따라 한국전에 비공식 참전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당시 대만 국방부 정치작전국 책임자였던 장경국(蔣經國) 전(前) 총통이 참전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심리전 요원 투입을 확실히 입증하는 미국 비밀 문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또 50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 사이 쿠바의 보병 1개 중대 파한(派韓) 제의를 수락했다. 이후 쿠바군 약 63명이 1차 파병돼 미군과 함께 작전한 것으로 보인다.

쿠바는 이어 군용기 파견도 제의했으며 미국으로부터 병력을 최소한 대대 규모로 늘리도록 요청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쿠바 깃발이 그려지고 쿠바인이 모는 수송기 최소 3대가 한국전에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파한 쿠바 병력이 대대 규모 이상으로 늘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부군 참전은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이 미 국방장관에 보낸 “국부군 한국전 투입”이란 제목의 52년 8월 5일자 극비 전문에서 사실상 확인됐다.

전문은 국부군 2개 사단이 한국전에 투입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게 좋겠다고 건의하면서 “현재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개개인과 조직의 장비”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국부군 요원들이 당시 이미 한국 전선에 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극비’란 표시 외에 안보 관련 정보란 도장까지 찍어 각별한 보안(保安)을 요구한 전문의 해당 대목은 이렇다.

“…따라서 국부군 2개 사단을 사용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절차가 필요하다…유엔 참전국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어 장개석(蔣介石)으로부터 현재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개개인과 조직의 장비도 포함해...국부군 32, 67 두 사단(대만 67군 소속)이 한국에서 유엔군사령부와 함께 작전할 것이란 확약을 받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장개석(蔣介石)은 한국전초 국부군 3만3천명과 군용기 20대를 보내려 했으나 미국이 중국을 의식해 거절하자 대신 심리전(心理戰) 부대를 보냈으며 장경국(蔣經國)이 당시 이를 실무 지휘했다고 라오 밍 탕 전(前) 대만공군참모총장이 밝힌 것으로 돼있다.

미 합참은 이어 52년 9월 국부군 해병 1개 연대를 한국전에 투입하는 방안도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그러나 국부군 전투 부대의 대규모 참전은 끝내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미 태평양군사령관 앞으로 된 52년 5월 27일자 미 합참 극비 문서가 이를 뒷받침한다.

국부군 심리전부대 참전 확인

전투사단 본격투입 무산

역시 “국부군 한국전 투입”이란 제목이 달린 문서는 “국부군 투입이 휴전 회담이 깨지거나 혹은 중공이 다른 곳을 침략하는 경우에 대비해서만 검토돼 왔음을 알린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이 문서가 사령부내에서도 꼭 필요한 군(軍) 요원에게만 공개돼야 하며 중국인이나 비(非) 미국 시민권자에게는 보여주지 말 것”을 강조했다.

합참 문서 등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론(推論)이 가능하다. 즉 미국은 한국전 후기 병력 부족으로 인해 국부군을 본격 투입하는 문제를 적극 검토했으나 휴전이 타결되는 바람에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姜昌成) 전 의원도 “6.25 때 대만군관학교를 마치고 갓 임관된 후 한국에 보내져 한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소대장을 직접 데리고 있었다”며 “본인이 아는 이같은 소대장만도 22명”이라고 증언했다. 대만의 한국전 참전은 당시 활발하던 그들의 본토 수복 노력과 직결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다음 두 비밀 문서가 이를 뒷받침한다. 미 합참이 50년 7월 17일 미 극동군사령부에 보낸 비밀 전문이 그중 하나다.

전문은 미 국무장관이 당시 국부군의 본토 공습 계획을 알아 차리고 주(駐) 대만 미(美) 공관에 이를 무산시키도록 긴급 지시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또다른 근거는 갓 공개된 대만 외교부 문서다. 이에 따르면 주일(駐日) 대만대사는 은밀히 방한(訪韓)해 53년 10월 29일 이승만 대통령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李대통령은 “…장개석 총통이 대륙을 공격하면 한국도 동시 또는 추후에 동북(만주)을 공격할 생각…”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따라서 장개석은 당시 본토 수복을 염두에 두고 한국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국부군의 한국전 참전을 밀어 붙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쿠바의 참전은 비교적 수월하게 이뤄졌다. 쿠바가 먼저 보병 1개 중대 파한(派韓)을 제의하고 미국이 이를 받아 들였다. 대한(對韓) 군사지원 현황에 관한 51년 2월 2일자 미 합참 비밀 문서는 쿠바 보병 63명 파한이 수락됐음을 재확인하면서 “병력이 1개 대대 규모로 늘어날지 모른다”고 덧붙이고 있다.

쿠바의 참전과 관련해 미국은 이들을 어떤 형태로 한국 전선에 투입할지를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50년 12월 15일 미 합참 전략회의는 쿠바군을 푸에르토리코로부터 한국전에 투입중이던 미 65보병연대에 배속시키는 게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은 50년 12월 20일 미 국방장관에게 극비 전문을 보내 미 육군에 쿠바군 파한을 지원토록 조치했음을 보고했다. 그러나 쿠바군이 미국의 바람대로 대대 규모 이상으로 증파됐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쿠바의 군용기 파견 제의가 실현됐는지도 확실치 않다. 쿠바는 당시 제의를 내면서 미국에 후불 조건으로 해당 수송기를 판매토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 국방장관에게 52년 1월 15일 제출된 미 공군 비밀 보고서가 파견 및 작전 투입 조건과 경비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쿠바기(機)의 한국전 참전은 실현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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