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장성훈 국장] 지난 2010년 정의에 대한 논쟁이 국내에 거세게 몰아친 적이 있었다. 미국 하버드대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펴낸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의 영향이 매우 컸다. 서점을 통해 판매된 부수만 200만을 돌파했을 정도니 말이다. 덕분에 샌델 교수는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한국을 방문해 직접 청중들과 정의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필자 역시 샌델 교수가 하버드대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를 TV 또는 인터넷 동영상으로 시청했으며 그의 책도 읽어보았다. 철학에 대해 문외한인 학생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미있는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토론식 강의를 하는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왜 샌델 교수의 ‘정의론’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2007~ 2008년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당시 한국 사회의 화두는 성장과 성공이었다. 누구나 성공하고픈 열망이 있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이런 화두에 불을 붙인 책이 있었다. 호주의 방송PD 겸 작가인 론다 번이 펴낸 <더 시크릿(비밀)>이 그것이었다. ‘처세술’ 을 다룬 책이었다. 성공에 목말라했던 국민들은  이 책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덩달아 서점에는 처세술과 성공과 관련된 책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그랬던 ‘성공’ 열풍이 2008년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시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일방적인 성장은 사회의 양극화만 재촉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세술 관련 책들이 서점에서 차츰 사라졌다. 한국 사회의 화두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 우리 사회의 화두는 성장과 대척점에 있는 분배로 변해 있었다. 어떤 분배가 정당하냐는 것이었다. 샌델 교수는 적시에 ‘정의’의 담론을 한국 국민들에게 던졌다. 덩달아 자유주의에 평등주의를 덧입힌 존 롤스와 공리주의 창시자 제레미 벤담 등 정치철학자들의 정의론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역시 지대했다.

시류에 민감한 정치인들은 성장주의에서 복지주의로 노선을 바꾸었다. 신자유주의 노선을 견지했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도 복지국가를 주창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로 인해 2012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무엇을 분배할 것인지, 누가 분배할 것인지, 누구에게 분배할 것인지,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복지 담론이 한국사회에 빠르게 확산됐다. 정치, 경제 등 각종 분야에서 ‘공정한 사회’라는 화두가 주요 주제로 다루어졌고 정의를 다룬 철학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들 정치철학자들의 정의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는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바로 그중 하나다. 사회적 약자와 공공 선택의 문제를 전쟁 상황을 통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존 밀러 대위(탐 행크스 분)는 8명의 대원을 이끌고 적진 속에서 실종된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을 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고향에서 아들 소식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 라이언 다수를 희생시켜서라도 라이언 일병을 구하겠다는 것이다. 라이언 일병 형제는 모두 전장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대원들 중 일부는 8명을 희생시키며 한 명을 구한다는 것은 군사자원을 심각하게 잘못 배분하는 것이라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나 롤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라이언 일병의 어머니는 최소의 수혜자로 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이 사회적으로 더 높은 가중치를 가지기 때문에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작전에 8명의 목숨을 걸 수 있다. 다시 말해, 다수가 최대최소의 원칙에 따라 소수를 위해 희생할 수도 있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고는 있지만 ‘다수를 위한다’는 민주주의의 맹점을 짚어낸 샌델 교수 역시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데 찬성하는 편에 설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공리주의자들은  한 계층의 희생으로 다른 계층들의 편익이 엄청나게 커질 수 있다면 소수의 이익은 희생될 수도 있다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작전을 용납하지 않는다.

당신이 밀러 대위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울까? 롤스의 편이라는 사람도 있을 테고, 벤담의 편에 설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정의가 무엇인지 필자도 잘 모르겠다. 철학이 사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듯 정의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의론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수단가치이기 때문이다. 정의가 본질 또는 목적가치라고 한다면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은 모두 본질가치인 정의 또는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가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들 수단가치가 본질가치 자리를 차고앉는 순간 비극이 찾아온다. 역사가 증명하듯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그랬다. 사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다만, 이들 수단가치가 본질가치 자리에 오르지 않았기에 아직까지는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뿐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장치권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난장판이다. 특히 야당들은 ‘정권교체’만이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며 온갖 정치적 방법을 동원해 집권당을 흔들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정권교체’는 정의를 위한 수단가치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정권교체’가 본질가치인 양 다른 수단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사생결단식으로 여당과 청와대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니 국정감사가 시작부터 파행되는 불상사가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부 정치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정의론도 마찬가지. 어떤 정치인은 자신이 정의롭지 않은 룰 하에서 당선되었음에도 전국을 누비며 정의를 설파하고 다니고 있다. 어이가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롤스의 정의론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이다. 롤스가 주장한 정의의 요체는 게임의 룰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그가 하는 행동이야말로 이율배반적이고 정의롭지 않다.

누구나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자 자신이 정의(定義)한 그 (正義)가 절대적이라는 건방진 자세를 내려놓고 상대적이 될 수 있다는, 또는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을 가질 때 비로소 바람직한 정의의 담론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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