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이 땅을 밟았던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평온함을 맛보게 된다. 화려한 도시 속에서 늘 쫓기듯 살아왔던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왔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영화 ‘대부’의 꼴 레오네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로부터 시작된 시로코라는 이름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거리엔 눈에 익은 가로수 대신 올리브와 아몬드나무가 이곳이 지중해의 중심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완벽한 떠남과 완전한 머묾을 찾아, 나도 그렇게 시칠리아의 품에 안겼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모두 품고 있는 지중해의 가장 큰 섬인 시칠리아. 각기 다른 대륙을 향해 뻗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이 섬을 여행하는 동안 마주했던 다양한 얼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무어인이었고 동시에 로마인이었으며 또한 지금도 시칠리아를 지키고 있는 이곳의 서민들이기도 했다. 지정학적 위치 탓에 항상 주변국들의 공격과 정복에 촉각을 세워야 했고, 두 번이나 도시를 사라지게 만든 에트나 화산도 시련의 깊이를 더했다.

시칠리아에서 삶의 터전을 일군다는 것은 굴곡진 역사를 써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토록 어렵게 시칠리아를 지켜내야만 했는지를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칠리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보는 동안 오직 하나의 문장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이곳에 조금 더 머물고 싶다. 그저 욕심껏 머물고 싶다는 것이었다.

팔레르모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 로마제국과 비잔틴, 아랍, 노르만의 영향을 받아 복합적인 문화가 융합돼 있다.

시내 곳곳의 건축물과 골목길에서 만나는 이색적인 풍경은 팔레르모만의 매력. 시칠리아 여행의 출발점으로 이 섬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거쳐가는 곳이기도 하다.
 
요새에서 궁전으로, 노르만 궁전
 
낯선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에는 누구나 아이와 같은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인지 처음 맞이하는 아침 풍경이 나중에 그곳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되기도 한다. 마침 주말을 맞이하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아침은 더 없이 여유롭고 느긋하다.

호텔을 나서자마자 벼룩시장을 여는 분주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을 빼곡하게 채운 각양각색의 물건들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팔레르모를 대표하는 중요한 관광지 중 하나인 노르만 궁전에 도착했다. 이 궁전은 외관부터 무척이나 독특한데 이 도시의 모든 건물들이 그러하듯 한 시기에 완성되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다른 민족의 다양한 양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궁전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간은 1140년에 만든 팔라티나 소성당.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나뉘어 있는 반면 벽면은 비잔틴 양식의 화려한 모자이크로 꾸며진 색다른 모습이다.

무엇보다 황금색으로 장식된 벽면은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고 있다. 9세기 아랍인들이 요새로 만들어 사용하던 것을 노르만인들의 점령 후에야 궁전으로 사용하게 됐다.

다양한 양식의 혼재, 점령자들에 의한 용도 변경. 그리고 수많은 확장과 개축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것. 첫 방문지인 노르만 궁전의 굴곡진 역사가 곧 시칠리아의 과거를 말해주고 있다.

<info> 시칠리아에도 개선문이 있다?
포르타 누오바 노르만 궁전 바로 옆에 있는 문. 1535년 카를로 5세가 튀니지와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일반적인 개선문과는 다르게 윗부분에 뾰족한 지붕을 얹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노르만 궁전에서 도보로 3분이면 만날 수 있다.

팔레르모 대성당

괴테는 오랜 시간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이르러서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수식어를 꺼냈다. 젤라또를 맛보며 산책하듯 거리를 걷다가 팔레르모 대성당 앞 광장에 멈춰 섰을 때 괴테가 했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노르만 궁전과 마찬가지로 대성당도 여러 가지 양식으로 완성된 모습이다. 그런 이유이기 때문일까 무려 200년에 걸쳐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대성당의 벽과 아치는 시칠리아의 수호 성녀인 로사리아를 모시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17세기, 시칠리아도 페스트의 악몽을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사람들은 로사리아 성녀의 이름을 외쳐 불렀고 그 후 기적적으로 페스트는 팔레르모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3세기부터 팔레르모의 성녀로 추앙받던 로사리아는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됐다.

지금도 성당 안에는 성녀  로사리아를 모시는 은으로 만든 성체함이 있다. 부유한 귀족의 신분을 버리고 동굴에서 은둔의 삶을 살았던 로사리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절박한 상황에 시칠리아 사람들이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은 그녀의 이름이자 곧 신의 손길이었다. 신은 그들에게 응답했고 그들은 오늘도 감사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tip> 세상의 모든 달콤함, 카놀리
‘달콤함’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의 돌체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돌체의 탄생지로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돌체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인기 있는 돌체는 카놀리. 밀가루와 계피, 설탕 등을 넣어 만든 원통형 페이스트리 껍질에 리코타를 넣어 만들었다. 영화 '대부'의 대사 중 ‘leave the gun. take the cannoli!(총은 버리고 카놀리나 챙겨!)’라는 대목에 등장하기도 한다.

지중해의 만찬, 발라로 마켓

궁전과 성당을 돌아보고 나니 발걸음은 자연스레 마켓으로 흘러들었다. 어느 도시나 전통시장 구경은 재미있지만 벼룩시장과 재래시장이 이어진 마켓이라면 더욱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 마켓은 관광객보다는 주로 현지인들이 식료품을 사기 위해 찾는 곳이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수제 엔초비 통조림이 눈을 사로잡는다.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주인이 직접 만들어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고 있는 엔초비. 그 앞에 맛과 품질에 대한 자부심으로 넉넉한 미소를 띠고 있는 주인 노부부의 얼굴에서 바다의 풍요를 삶으로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고기와  갓 잡아 올린 참치들, 화려한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제철 과일과 채소들이 수많은 향신료들과 함께 내뿜는 향기가 아찔하다.
 
토요일 오전, 시장의 모든 것은 햇것으로 싱싱하게 빛난다. 그렇기에 더욱 건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발라로 마켓에서 진짜 시칠리아 사람들을 만났다.

세계적인 성당을 품은 작은 마을, 몬레알레

내일이면 팔레르모를 떠나야하는 여행자에게 10km 미만의 근교에 훌륭한 또 하나의 관광지가 있다는 것은 행운과도 같다.

300미터가 넘는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 몬레알레는 왕족들이 무더위를 피해 휴양을 즐기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 관광객들이 이 작은 마을을 찾는 이유는 산타 마리아 라 누오바 대성당의 황금색 모자이크를 보기 위해 서다.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가득한 성당의 내부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이 작은 마을로 향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골목마다 무심한 듯 세심하게 꾸며놓은 테라스들이 햇살 아래 빛나고 있다.
 
노란 색 벽과 어우러진 담쟁이 넝쿨과 화분, 잘 마른 빨래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유명 관광지임에도 시칠리안들의 일상을 소중히 지켜나가는 모습이다.
세계적인 관광지가 됐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이 바로 이 작은 마을의 진짜 매력이다.

아그리젠토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시칠리아에서 두 번째로 번창했던 도시다. 콘코르디아 신전, 헤라 신전, 제우스 신전 등 수많은 신전들이 집중돼 있는 신전들의 계곡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리스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어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과도 같은 곳. 시칠리아를 찾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도시다.

<tip> 터키인의 계단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풍경 중 하나, 터키인의 계단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탈리아의 자연 명소 중 가장 놀라운 풍경으로 꼽히는 이곳은 고대 터키 해적들이 이곳에 자주 침입하면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됐다고. 바람과 비의 침식 작용에 의해 자연적으로 완성된 계단은 신전의 계곡만큼이나 아름다운 아그리젠토의 명소이다.

지상에 머물 수 없다면,
신전들의 계곡
한국을 떠나 로마로, 다시 로마에서 팔레르모를 거쳐 아그리젠토에 오기까지 시칠리아를 대변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가 있었다.

시칠리아 여행과 관련된 책을 찾아보면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사진이 바로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의 계곡이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사진으로 이미 수없이 봐왔던 곳이라 오히려 식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완벽에 가까울 만큼 보존 상태가 뛰어난 콘코르디아 신전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로마와 터키에서 만났던 신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큼 현실적이다. 금방이라도 제단에 불을 피울 것만 같은 느낌은 신전 앞의 이카루스 동상과 함께 선명하게 남았다.

제우스, 헤라클레스, 헤라 등의 이름을 갖고 있는 신전들도 올리브 나무와 선인장들과 어우러져 거칠면서도 아련한 풍경을 연출했다. 마침 고대 도시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과 위용이 느껴지는 신전들의 계곡에서 시칠리아의 소나기를 맞았다.

습관처럼 비를 피해 나무 아래에 서 있다가 비를 맞고 걸어가는 시칠리아 사람을 보았다. 이곳 사람들에게 비는 피할 것이 아니라, 취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주신 축복이라며 즐겁게 단비를 맞는 사람들이 사는 곳. 시칠리아에 내리는 비는 곧 강이 되고 또 그 강물은 바다로 나아가 지중해가 될 것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히 피하지 않을 가치가 있었다.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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