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와도 상의 안 해… 美, 정부 大田 이동 적극 만류

美 극비문서, 조병옥 테러 李정권 소행 밝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북한이 남침한 지 불과 하루여만에 정부를 대전(大田)으로 옮길 작정이었으며 당시 신성모(申性模) 국무총리서리와는 이 문제를 상의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비밀 해제된 미(美) 문서들이 밝혔다.

이에 대해 당시 무초 미(美)대사는 정부가 서울에 남아야 남침을 막을 수 있다고 설득했으나 이(李)대통령이 북한군에 붙잡히면 안 된다고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李)대통령은 또 1952년 1월 비밀 각의에서 자신은 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이 없으며 중공군 포로 일부를 장개석(蔣介石) 정부에 넘길 생각이라고 말한 것으로 미(美) 중앙정보국(CIA) 첩보 채널이 워싱턴에 전해 미국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휴전 직전 발생한 조병옥(趙炳玉) 테러 사건도 당시 진헌식(陳憲植) 내무장관이 경무대에 사전 보고하지 않고 저질러 나중에 대통령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드러나는 등 한국전 전반에 걸쳐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난맥상이 끊이지 않았음이 재확인됐다.

이(李)대통령은 6.25 발발 직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으로 미(美) 극비 문서들이 전한다. 미(美) 동부 시각으로 6.25 당일 저녁 8시 20분 미(美) 합참 작전 상황실에 입전된 극비 전문(MUCCIO CM IN 7796) 내용을 당직 장교는 일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李)대통령이 낙담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자제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길 원한다.” 당시 전문은 합참 수뇌부에 즉각 보고됐다.

무초 대사가 미(美)국무장관에게 보낸 극비 전문도 충격적이다. 50년 6월 26일 자정 서울서 발신된 것이다.

“…이(李)대통령이 (26일) 밤 10시 전화를 해 만나자고 했다. 때마침 대사관에 와 있던 신(申)총리서리와 함께 경무대로 갔다. 이범석(李範奭) 전(前) 총리도 와 있었다. 이(李)대통령은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얼굴을 실룩이며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말이 통 앞뒤가 맞지를 않았다…그는 정부를 오늘밤 대전으로 옮기기로 각의가 결정했다고 밝혔다…”

무초 대사는 반대했다. 전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정부를 옮겨서는 안 된다고 이(李)대통령을 설득했다…정부가 서울을 떠나면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하게 된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는 통 듣지를 않았다. 자신의 안전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면서도 정부가 적에게 유린될지 모를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는 (억지) 논리를 되풀이했다…도무지 그를 회유시킬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정부가 떠나더라도 본인은 서울에 남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왔다…”

전문의 마지막 대목은 더욱 놀랍다. “경무대를 막 나서려는데 신(申) 총리서리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李)대통령이 자신과 상의조차 없이 정부 이동을 결정했다고 귀띔했다.”

미국은 이(李)대통령이 전쟁 기간 중 주요 인접국들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도 크게 신경썼다. 공산 포로와 일본 내 한국인 처리 문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CIA가 미(美)국방장관과 국무부 등에 보낸 52년 1월 22일자 극비 전문이 눈길을 끈다.

지난 연말 비밀 해제된 전문은 “미국이 통제하는 정보원이 (한국의) 관(官)에 있는 믿을 만한 제보자로부터 입수한 내용”이란 설명과 함께 “이(李)대통령이 (52년) 1월 중순 열린 비밀 각의에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이 장차 한국민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며 한국 정부도 이들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李)대통령은 또 중공군 포로 중 국부군 출신을 대만 정권에 념겼으면 한다는 뜻도 밝힌 것으로 전문은 덧붙였다. 이(李)대통령과 미국은 당시 공산군 포로 처리 문제로 미묘한 갈등을 빚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여기서 CIA 전문이 보안을 거듭 강조한 점도 관심거리다. 서두에 “특별 취급 요망. 외국인 열람 금지”란 표시를 해놓고도 안심이 안 됐던지 본문에서 “이 내용은 국가 안보에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더 이상 퍼져서 안 되며 미(美)국외로 나갈 경우 발신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미(美)관리 외엔 취급 금지”라고 상기시켰다. 그만큼 사안이 민감했던 것이다.

미(美)극비 문서들은 휴전 직전 발생한 조병옥(趙炳玉) 테러 사건이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소행임도 밝히고 있다. 53년 7월 2일 유엔군사령부가 미(美)합참에 보낸 당시 남한 정황(政況)에 관한 극비 보고서가 이를 언급하고 있다.

“믿을 만한 한 소식통은 (53년) 6월 24일 李대통령과 대화하는 도중에 조병옥(趙炳玉) 테러가 당시 진헌식(陳憲植) 내무장관의 지시로 이뤄졌음을 알게 됐다. 같은 날 경무대에서 열린 각의에서 이 문제가 거론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李)대통령은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보고서는 이어 “이(李)대통령과 여러 각료들은 기분이 나빴다. 이(李)대통령은 진(陳)장관의 ‘월권’을 나무랐다. 그러면서 이 소식통은 이(李)대통령이 테러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덧붙인다.

역시 서두에 “특별 취급 요망. 외국인 열람 금지”란 표시가 된 이 보고서는 조병옥(趙炳玉) 테러사건으로 당시 남한에 깔아둔 미(美)첩보망에 타격이 있지 않을까도 걱정했다. 해당 대목은 이렇다.

“조병옥(趙炳玉)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김성주(Kim Song Ju)가 남한 당국에 체포됐다. 김(金)이 강압에 못 이겨 그간 조(趙) 및 잭과 유지해 온 관계를 실토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美정보원임이 분명한 잭이란 인물에 관해서는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에서 먹겠다’고 호언하던 李대통령이건만 막상 북한이 도발하자 이처럼 허둥댔던 것이다.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난맥상은 이후에도 계속되다 결국 4.19 혁명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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