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그 이름만으로 여행자들에게 묘한 설렘과 도전을 떠올리게 만드는 길. 지난날 실크로드로 모여들던 대상의 장관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지만 비단을 싣고 사막의 별을 쫓아 먼 길을 떠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에는 그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중국의 중원에서부터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그리고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에 이르는 약 6400km의 실크로드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길 중 하나다. 이 길을 오가던 가장 주요한 교역품은 비단이었다.

때문에 이 길은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얻었다. 먼 옛날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난주에서 돈황까지 고비사막과 기련산맥으로 둘러싸인 좁고 황량한 길인 하서회랑을 지나야만 했다.

황하의 서쪽에 있는 좁은 복도라는 뜻을 가진 하서회랑에는 무위, 장액, 돈황 등 실크로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오아시스 도시들이 모여 있다. 그 옛날 이 길을 통해 세계 각지로 뻗어나간 혹은 세계 각지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과거 중국의 찬란한 문화, 다양한 민족 그리고 눈부신 자연을 찾아 떠났다.

▲ 난주시

난주는 중국 영토의 심장부에 위치해 예로부터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또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로 황하를 따라 중국, 유럽, 중동 사람들이 함께 뒤섞였다. 중원에서 서역으로 갈 때, 또 서역에서 중원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 가던 800km에 달하는 하서회랑의 시작점으로 지난날 대상들이 서역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던 곳이다. 실크로드와 함께 발전한 1400년 고도에서 서역으로 향한 대상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본다.

어머니의 강, 황하 모친상

중국 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황하는 황토대지로 이루어진 감숙성에서 흙탕물로 바뀐다. 난주시로 들어서니 도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흐르는 황하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빠른 속도로 흐르는 누런 황하의 모습에서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거대한 황룡이 연상된다.

황하는 문명의 젖줄로서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로 손꼽히는 황하문명을 탄생시킨 곳으로 오래전부터 수많은 고대 국가들이 황하 강변에 수도를 마련했다.

황하가 없는 중국은 상상하기 어렵고 그래서 중국인들은 황하를 어머니의 강이라고 부른다. 난주시의 황하 강변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황하 모친상이 있다. 인자한 표정의 여인이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 있고 여인의 품에서 해맑게 미소 짓는 아기가 엎드려 있는 모습. 누워 있는 여인이 황하, 아기는 중국인들을 의미한다.

황하 최초의 철교, 중산교

황하 모친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중산교가 있다. 중산교는 1907년 독일인이 지은 철교로 황하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다리라고 해 ‘황하제일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100년이 넘은 철교는 옛 모습 그대로 투박하지만 꾸밈없는 그 모습이 다리 아래로 쉬지 않고 세차게 흘러가는 황하와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에 모여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다리의 끝에서 끝을 오가며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하고 난간에 기대어 오랜 세월 덧없이 흐르는 황하를 바라보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중산교를 즐긴다. 중산교 너머로 백탑산이 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에 있는 백탑사는 원나라 때 칭기즈칸의 초대를 받은 티벳의 승려가 몽고로 향하던 중 난주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승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칭기즈칸이 세운 사찰이다. 사람들은 산 정상에서 황하와 난주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풍경을 보기 위해 백탑산을 오르는 수고를 마다 하지 않는다.

실크로드 여행에 앞서, 감숙성 박물관

감숙성은 중국의 시조인 복희와 여와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 만큼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는 곳이다. 감숙성 박물관에는 고생물 화석과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 그리고 송·원·명·청시대의 도자기와 비단, 한나라 시대 죽간과 불교 예술품 등 무려 35만여 점의 유물이 소장돼 있다.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한나라 장군의 무덤에서 발굴된 ‘마답비연상’이다. 하늘을 나는 제비를 밟고 달릴 정도로 빠르다는 천리마의 뜻을 가진 마답비연. 피땀을 흘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한혈마를 본뜬 청동상으로 그 크기는 작지만 청동상에서 뿜어 나오는 역동감이 넓은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 장액시

장액은 하서회랑의 중간 지점에 있는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다. 장액이라는 지명은 흉노를 몰아낸 한무제가 ‘흉노의 팔을 꺾고 중국의 팔을 펼치다’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했다. 

난주에서 장액으로 출발한 열차는 왼쪽으로는 만년설이 있는 기련산맥, 오른쪽으로는 고비사막을 끼고 달린다. 한참동안 차창 밖으로 황량한 벌판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양과 말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초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소수민족의 모습이 여행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단순한 듯 다채로운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열차는 금세 장액에 도착한다.

중국 최대의 실내 와불,
대불사

 
감숙성은 중국에서 가장 낙후된 곳 중 하나로 꼽히는 지역이라고 한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본 장액은 예상보다 잘 정돈된 도시였다. 

대불사는 1098년 서하지역 한족화 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불교 사찰로 대불사 앞 동그란 모양의 대문을 통해서 담기는 대불사 경내의 모습이 특별하다. 이곳에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와불을 모시고 있다. 

약 35미터에 달하는 이 와불은 중국의 실내 와불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폴로도 이곳의 웅장함에 매료돼 장액에 1년 정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불상의 좌우로 재가한 남자와 여자 신도의 입상이 있고 뒤편으로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상이 있어 열반의 자리를 경건히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본당 뒤쪽으로 34미터 높이의 흙으로 된 탑이 하나 서 있는데 이는 티벳 불교의 영향을 보여준다. 대불사는 시내 중심에 위치하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간직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일곱 가지 색, 일곱 가지 풍경,
칠채산

 
장액 도심에서 버스를 타고 칠채산을 향해 출발한 지 30분여, 차창 밖으로 붉고 노랗게 물든 바위산들이 등장하고 버스 곳곳에서 크고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온다. 

실크로드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봤던 칠채산의 사진 한 장, 층층이 다른 색으로 물든 바위산이 끝없이 펼쳐진  모습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행성의 모습 같았다.

일곱 가지 색을 띤다고 해 붙여진 이름 칠채산. 이곳의 정식 명칭은 ‘장액단하국가지 질공원’이다. 단하라는 단어는 붉은 노을을 뜻하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지질운동을 거친 붉은색 사암이 풍화, 퇴적, 침식을 반복하며 빨강, 연두, 하얀 빛깔을 띠는 퇴적물로 층층이 쌓인 독특한 지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다양한 색 중 흰색은 소금이 굳어진 것으로 오랜 옛날 이곳이 바다였음을 짐작케 한다. 비 내리는 날의 칠채산은 빗물을 머금어 더욱 선명해지고, 햇살 좋은 날의 칠채산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듯하다고 한다. 
 
‘압도’라는 단어가 이곳처럼 잘 어울리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마냥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광에 감동이 밀려온다. 사막의 황량하고 거친 바위산도 그림처럼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자연은 꽃과 나무가 있어야만 아름다울 거란 생각은 편견이었음을 배운다.

▲ 가욕관시

가욕관시는 감숙성 하서회랑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하서회랑에서 가장 좁은 통로로 불린다. 가욕관시는 고대 실크로드의 교통요지이자 서역 쪽에서 몰려오는 이민족을 막아내던 전략 요충지였다. 
 
이곳을 막지 못하면 바로 서안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역대 중국 왕조는 이곳에 성벽을 쌓고 철옹성의 방어진을 구축했다. 장액에서 느닷없이 불어온 돌풍을 뚫고 3시간여를 달려 가욕관에 다다랐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 그리고 중국에서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던 가욕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다. 웅장한 성채의 모습이 먼 곳에서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흉노족과 사막을 걸어온 상인들은 거대한 성채의 모습에 절로 압도당했을 것이다. 1372년 명나라 시대에 건설된 관문인 가욕관은 세월을 빗겨간 듯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성루는 외성과 요새처럼 쌓아올린 내성으로 분리돼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 덥고 건조한 바람을 맞으며 성채의 외성을 따라 걷는다. 높고 험준한 기련산맥과 황량한 고비사막 사이로 끝없이 뻗어나간 장성이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성문은 서역 방향과 중국 내륙 방향으로 두 개가 있다. 

동문은 상서로운 기운이 동쪽에서 솟아올라 천하를 비춘다는 뜻의 광화문, 서문은 회유해 먼 곳을 다스리고 서쪽 변방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의 유원문으로, 서역이 안정되기를 바랐던 과거 중국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 돈황시
 
이번 실크로드 여행의 종착지이자 하이라이트, 돈황. 실크로드가 번성했을 때 서역을 오가는 이들은 돈황에 들러 본격적으로 먼 길을 나아갈 채비를 했다.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던 이곳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예술도 함께 꽃피었다. 난주를 출발해 약 1200km를 달려 마침내 서역의 시작점이자 이번 실크로드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돈황에 닿았다.

벽화예술의 정점, 막고굴
 
모래바람이 불어대는 돈황 하늘 아래 주인을 알 수 없는 사리탑 몇 개가 막고굴 앞을 지키고 서 있다. 절벽에 뚫린 수많은 석굴들이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서기 366년 낙준 스님이 상서로운 빛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있던 절벽에 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시초로 이후 14세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석공, 시주들이 드나들며 1.7km에 달하는 절벽에 735개의 석굴을 만들었다. 남아 있는 석굴이 수백 개에 이르지만 현재는 보존을 위해 60개 정도만 개방하고 있다. 
 
가이드와 함께 1시간여 동안 10여 개의 석굴을 돌아봤다. 황량한 고비사막과 죽음의 땅으로 불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야 했던 사람들.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사막의 기후와 침략자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마음을 위로하고 여정의 무사안녕을 빌기 위해 막고굴을 찾았을 것이다. 
불교 경전의 내용과 민간 전설 혹은 사회 풍속을 그린 벽화들이 끊임없이 눈에 띈다. 그 모습에서 사람들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각 석굴을 빼곡히 채운 불상과 벽화의 내용, 형태는 저마다 다르지만 하나같이 종교적 고행이 느껴져 자연스레 숙연한 마음이 든다.

고운 모래 산, 명사산
 
첩첩이 이어지는 모래 구릉과 사막을 가르는 낙타의 행렬이 실크로드의 중심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하늘이 흐렸던 것은 모래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느닷없는 빗방울이 후두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연중 약 10일 정도만 비가 내린다는 돈황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흙비가 내린다. 명사산의 모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사실이 못내 아쉽지만 사막에서 비를 만난 일은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덕분에 강한 햇살이 비구름과 모래바람에 자취를 감추어 생각보다 수월하게 명사산을 오른다.

모래산의 능선에 올라 내려다보는 풍경은 산을 올라 온 수고를 잊게 만든다. 겹겹의 모래 산들이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선과 따뜻한 색감 그리고 흙비가 내리는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초승달 모양 오아시스의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뽀얀 시야 속에 오롯이 담기기에.

모래 위로 솟아오른 초승달,
월아천

‘들어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막’이라는 뜻을 가진 황량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목전에 둔 그리고 이제 막 그 죽음의 길을 건너 돈황에 도착한 승려와 대상들에게 월아천은 생명수가 돼 주었다. 

건조한 모래사막에 둘러싸이고 사방에서 거센 모래 바람이 불어도 오랜 세월 월아천은 모래에 덮이지 않은 기적을 연출하고 있다. 비 내리는 사막 한가운데의 초승달 모양 샘과 초록빛으로 출렁거리는 풀들 그리고 고운 흙빛 누각이 어우러진 풍경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난주에서 시작해 장액, 가욕관을 거쳐 돈황까지. 오아시스 위로 지나온 여정과 이 길을 지나갔을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맑은 월아천에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비추어보며. 또 다른 여정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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