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져졌다.” 지난 4일 한나라당의 서청원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 중진 10인이 비공개 모임을 갖고 공천신청거부에 돌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무감사문건 유출’나흘 만에, 비주류측이 전격적으로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날 박종희 김용학 심규철 의원 등 ‘친서(親徐) 성향’의 미래연대 소속 의원들도 공천심사위 재구성을 요구하는 등 소장파까지 분열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공천 개혁’이라는 명분을 움켜쥐고 정면 돌파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주사위는 양쪽 모두가 동시에 던진 것이다. 최병렬 대표와 서청원 전대표가 공천 문제를 놓고 정면 격돌,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당내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의 분당까지 거론되는 등 일촉즉발의 양상이다.

최 대표는 서 전대표측과의 타협을 사실상 전면 거부했고, 서 전대표측도 일전 불사의 결의를 다지고 있다. 비주류의 대응이 예상 이상으로 ‘극렬한’ 데는 당무감사 문건 유출 파동을 전후한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 한나라당의 당무감사결과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다선 중진을 포함해 35명의 현역의원이 일거에 공천탈락이 예상됐다. 지난 16대 총선에서 이회창 전총재도 하지 못한 과감한 물갈이를 예고한 것이다. 그 당시 이상으로 강도 높은 물갈이를 강행한다는 점에서 한층 혁명적이다. 물갈이를 강도 높게 시도한다면 반발 강도도 높기 마련. 그러나 최 대표 쪽은 물갈이 과정을 의외로 미숙하게 처리함으로써 비주류측에 명분을 제공한 측면이 강하다. 서청원 전대표의 경우는 지난해 12월 22일 극비회동을 가질 만큼 절차를 밟아왔다. 문건파동 전까지도 최 대표의 핵심 측근이 서 전대표를 찾아 “공천개혁에 동참해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다 벼락을 맞게 된 서 전대표는 “당무감사 결과 조작은 정적을 없애고 자기 사람을 심으려는 정치적 살인행위”라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 전대표의 한 측근은 “경기도 P의원은 비대위 간부로부터 당무감사 결과 B등급 통보를 받았으나 자료에는 C등급으로 나와 있다. 백승홍 의원도 대구에서 A등급을 받은 3명 중 한명이었으나 자료에서는 C등급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이 측근은 또 “이밖에도 당무감사를 밀실에서 조작한 증거가 많이 나타났고, 시간이 가면 지도부가 불리하기 때문에 시간여유를 주지 않고 공천신청을 강행해 반발을 잠재우려는 수법”이라며 “당무감사 자료를 누가 조작했는지, 어떻게 유출했는지 가려내지 않은 채 공천심사를 강행하는 것은 공천혁명의 탈을 쓴 5·6공식 쿠데타적 발상”이라고 지도부를 비판했다.이런 대목은 지난 16대 총선 당시 민주당에서 김상현 의원이 잘려나가는 과정과도 비교된다.

여권 핵심부는 김 의원과의 협력을 전제한 뒤 총선시민연대가 김 의원을 낙천대상으로 지목, 서서히 그의 낙천을 기정 사실화해 나갔다. 나름대로 여론을 수렴하는 모양도 갖춰가면서 상대방의 반발 강도를 약화시켜나갔던 것이다. 최 대표 진영의 전략·전술은 ‘초반 돌발상황’으로 빗나갔다. 공천과 관련한 최 대표쪽의 전략적 목표가 차기에 걸림돌을 제거하자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잠재적 당내 경쟁자인 당내 중진들을 단칼에 날려버리려 함으로써 이들이 응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실제 비주류의 반발은 애초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서 전대표의 핵심측근은 “공천 작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공천 신청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사태를 이용해 당권투쟁에 나서지도 않을 것이며, 공천 신청을 하지 않더라도 서 전대표는 당에 남아 백의종군하며 당을 개혁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지난 4일 저녁 양정규,박희태,하순봉 의원 등 당 중진 12명도 서울의 한 식당에 모여 “공천심사위를 재구성하고 공천 신청 기간을 연장하라”는 뜻을 이 자리에 참석한 홍사덕 총무를 통해 당 지도부에 전달했다.

내분의 중심에 서있는 최병렬 대표는 정면승부수를 띄웠다. 최 대표는 지난 4일 “당 개혁과 공천혁명은 흔들림 없이 계속돼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했다.공천 갈등의 한 축인 서 전대표 중심의 비주류를 사실상 ‘공천혁명’에 반기를 드는 ‘반개혁적 세력’이라고 규정한 것. 최 대표가 “당무감사 자료 유출이 빌미가 돼 당의 개혁이 가로막히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한 점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는 갈등의 성격을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로 몰아 개혁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공천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다.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이 7일 당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미래연대 소속 남경필,오세훈,원희룡,정병국 의원 등과 만나 당의 진로에 대해 논의하기로 한 것도 당 지도부의 ‘개혁세력 끌어안기’ 전략의 일환이다.

최 대표는 또 “당무감사 자료에 주관적 판단이 일부 개입되긴 했으나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부분은 절대 없다”고 조작 의혹을 일축했다.최 대표는 이날 공천심사위를 재구성하고 국회의원 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서 전대표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같은 일련의 내분사태는 좀더 본질적 측면에서 볼 필요도 있다. 최 대표 진영과 비주류간 정면 대결의 이면에는 영남지역주의의 분출이라는 성격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최 대표가 공천 물갈이를 통해 영남권을 단숨에 장악하려 하자, 영남권의 기성 주류 정치세력들이 그에 맞서 정면승부를 꾀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최 대표가 영남민심을 깡그리 무시했다”는 한 비주류 중진 인사의 주장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실제로 이같은 속내는 한나라당의 분당 우려를 짙게 하고 있다.

비대위해체와 공천작업중단 요구 서명작업에 참여한 72명의 의원 중 부산·경남 출신의 한 중진의원은 “이회창계와 서청원계는 물론 영남권을 의도적으로 공천에서 배제하자는 것으로 밖에 볼수 없다”고 규정했다. 서 전대표를 비롯, 하순봉, 신경식, 이규택, 박원홍, 윤두 환의원 등 10여명이 모여 ‘행동’의 필요성에 공감한 것도 이같은 배경이다. 서 전대표측의 향후 수습책은 조기 전당대회개최-새지도부 구성-제2창당으로 요약된다. 최 대표와 서 전대표의 극한 대립은 그동안 당개혁을 주창해온 소장파까지 분열하는 상황으로 확대됐다. 친서(親徐) 경향인 박종희, 심규철, 김용학 의원 등 미래연대 소속 원내외 지구당위원장 8명은 4일 성명을 내고 당무감사자료 즉각 공개, 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 개최, 공천심사위 재구성 등을 최병렬 대표 등 당 지도부에 요구하면서 미래연대 현지도부도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성명에서 “미래연대 지도부가 회원들의 의견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당무감사자료에 대한 문제제기를 반개혁적 움직임으로 몰고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미래연대 현지도부를 비판한 뒤 “미래연대 회원중 누가 진정한 개혁주의자인지, 홍위병인지를 규명하기 위한 공개토론을 갖자”고 제안했다. 미래연대 소속 남경필,오세훈,원희룡 의원 등은 “이번 사태를 빌미로 정치개혁과 당 개혁의지가 희석·퇴색돼서는 안된다”며 의견을 달리해 최 대표 등 당 지도부에 힘을 실어줬다. 미래연대 소속 한 의원은 “지난번 미래연대 회의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감지되는 듯하긴 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거질지는 몰랐다”며 “소장파 내부에서조차 이견을 갖고 서로 싸우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고 아쉬워했다. 5일 격전이 예상됐던 운영위원회 회의에서는 비주류 계열 운영위원과 일부 중진의원이 당무감사자료 유출과 공천신청 접수 강행 등을 놓고 지도부를 집중 비판하면서 공천일정 중단, 공천심사위 재구성 등을 강력히 요구, 주류측과 설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이로써 양진영중 어느 한쪽 손에는 피를 묻힐 수밖에 없는 양상이다. 최 대표는 기본적으로 공천일정의 재검토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최 대표는 당무감사 문건 유출 파동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가운데 물밑에서 비주류 설득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비주류쪽은 최 대표 직무정지가처분 조치를 내는 방안을 고려키로 하는 등 반격의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결국 이번 파동은 1차적으로 최 대표측과 반대파의 정치적 생존과 주도권 싸움인 셈이고, 최악의 경우 분당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