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권 위반에 강력 유감 표명… 한·미 외교 긴장 고조

1979년 외교문서… 박정희-카터는 ‘주한미군 철수’ 갈등

1979년 신군부(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만든 비공식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권을 잡은 군 장성들을 이르는 명칭)에 의한 12.12 사태가 발생한 직후 미국(美國)이 한국 정부와 신군부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고 정치적으로 민간정부를 전폭 지지한다는 입장을 전달한 사실이 공식 외교문서로 확인됐다.

외교통상부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1979년 문서들을 중심으로 모두 1천 270여권(18만여쪽)의 외교문서를 지난 2010년 2월 22일 공개했다. 정부의 외교문서 공개는 당시 17번째를 맞았다. 공개된 문서에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건과 12.12 사태, 고상문 씨 납북사건, 재일동포 김희로 씨 사건, 주한미군 철수, 일본 홋카이도 근해 한국어선 조업 문제, 한덕수 조총련 의장의 방북 등을 둘러싸고 당시 긴박했던 한국 정부의 대응동향과 외교비화가 상세히 수록돼있다.

12.12 사태와 관련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신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 리처드 홀부르크 국무부 차관보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한국 정부와 신군부 측에 강한 유감과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 정부는 특히 이 과정에서 신군부가 작전통제권 행사와 관련한 한·미 간의 합의를 위반한 데 대해 백악관과 군부의 강력한 불만을 전달하고 향후 민간정부를 전폭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 12.12 사태 직후 미국과 신군부 측 간의 긴장이 고조돼 있었음이 공식문서로 확인됐다.

홀부르크 차관보는 쿠데타 발생 이틀만인 14일 오후 5시(현지시각) 김용식 당시 주미대사를 초치, “현재와 같은 여건에서는 미국 내에서 한국에 불리한 여론이 크게 대두될 것”이라며 “군 체제가 너무 급격하게 변동돼 군 지휘 체계가 동요될 수 있어 김일성이 군사적인 모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쿠데타 발생 이튿날인 13일 당시 최규하 대통령,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난 데 이어 19일 박동진 외무장관을 면담해 “한국군이 미국 측과의 협의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대와 사단병력을 자의로 이동해 한미 연합군의 군사적 유효성과 행동의 자유를 지극히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히 “미 군부는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고 이러한 불만은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미 합참의장을 거쳐 백악관의 최고위층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라며 “미국 정부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민간 정부와 상대할 것이며 민간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hundred percent support)”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당시 외무부는 김용식 대사에게 훈령을 내려 ▲(정승화 육참총장 체포와 관련한 군내 동요) 사태가 잘 수습됐으며 ▲정치발전 체계를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최규하 정부의 입장을 홀부르크 차관보에 전달하도록 했다.

또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79년 6월 서울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당시 박정희 정부와 지미 카터 미 행정부는 주한 미 지상군 철수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카터 대통령이 1976년 대선공약으로 제시한 뒤 1977년 7월 10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최초 철군일정이 합의되면서 표면화됐으며 이후 1978년 4월 카터 대통령은 당초 철군계획을 조정, 공식 발표했다.

박정희 정부는 당시 외무부에 의해 작성된 한미 정상회담 의제 관련 문건에서 “주한 미 지상군의 한국주둔은 북괴 도발에 대한 실질적인 억제 전력역할을 수행해왔고 한국은 미국을 반공보루의 혈맹으로 가장 신뢰하고 있다”며 미국 측의 주한미군 철수를 저지하기 위한 대응논리를 치밀하게 수립했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은 양국 정상회담을 거치며 취소됐고 같은 해 8월 8월 카터 대통령이 박 대통령에게 “한국을 제외한 미·북 간의 평화협정 대화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는 등 양국관계는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섰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지난 1979년 8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을 제외한 북·미간의 평화협정 회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낸 것도 확인됐다.

이 서한은 한·미 양국이 같은해 7월 남·북·미 3국 평화협정 회담을 제안한 데 대해 북한이 우리 측의 당사자 자격을 문제 삼으며 거부하자 카터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카터 대통령은 서한에서 “미국과 북한이 따로 만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 대해 북한이 확실히 알게 된다면 우리가 제안한 미국, 한국, 북한의 3자 회담에 대해서도 북한이 유연한 태도를 보일 것으로 본다”며 “미국은 한국이 배제된 어떤 형태의 대화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에게도 전달했다”고 밝혔다.

카터 대통령은 또 주한미군 철수 계획의 취소와 관련, “나의 이번 결정은 미국에서도 환영을 받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유지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하다”면서 “미군이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는 동안 한국도 군 전력을 향상시키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박 대통령이 같은 해 7월 17일 긴급조치 위반 사범 86명을 석방한 것과 관련, 카터 대통령은 “이번 석방과 함께 다른 정치범들도 석방할 것이란 방침을 환영한다”며 “이번 조치는 표현의 자유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밖에 1979년 2월 중국-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을 지원하던 소련이 남중국해에 군함을 배치하는 등 소련과 중국이 정면충돌 직전까지 갔던 외교비사와 1979년 3월 당시 한덕수재일조선인총연합회 의장(2001년 2월 사망)의 북한 방문 문제를 놓고 한국과 일본 정부가 치열한 신경전을 전개했던 일화가 뒤늦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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