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혼란했던 의원 내각제 갑자기 막 내려

장도영 육참총장, 유엔사령관에 쿠데타진압 SOS

유혈사태가 벌어진 1960년 4월 19일 밤 매카나기 미국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는 당시 김정렬(金貞烈) 국방장관과 홍진기(洪璡基) 내무장관이 배석했다. 이 대통령은 그의 각료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잘못된 상황보고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장면(張勉)부통령을 비롯해 민주당을 강력히 비난했다. 그는 데모의 규모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매카나기 대사는 이 대통령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수 있도록 힘을 들여 설명했다. 어느 정도 성과는 거두었으나 이 대통령이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과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이 돼 있다는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인식의 결여는 이틀후 매카나기 대사가 이 대통령에게 비망록을 전달했을 때 확연히 드러났다. 이 대통령은 문제가 천주교의 지지를 받는 장 부통령의 음모 때문이며 미 국무부가 순진하고 상황을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매카나기 대사의 두번째 이 대통령 면담 후 국무부는 서울에다 “이 대통령이 상황을 오해하고 있고 음모 주장이 자의적인 데 대해 매우 실망스럽고 우려하고 있다"고 통보했다. 미국은 확고한 방침에 따라 필요하면 이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성명을 발표하기로 돼 있었다. 한편 미대사관은 책임 있고 영향력 있는 한국 인사들에게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고 새로운 행정부로 교체하기 위해 이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을 고립시키고 이승만정권이 타도될 경우에 대비한 행동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무부가 예상한 긴급사태는 쿠데타이거나 군부가 과도정부를 맡는 것을 포함했다.

상황에 대한 우려는 미 당국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4월 20일 한국 해군 참모총장은 미 해군무관에게 매카나기 대사가 이 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 이기붕(李起鵬)의 사임을 받아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해군참모총장은 많은 한국군 장교들이 이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강조했으나 누구도 직접 그 같은 제안을 할 용기를 갖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대통령의 권력이 너무나 막강해 “모가지가 달아날”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4월 26일 5만여 시민들이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있는 가운데 매카나기 대사는 아침 9시경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 대통령이 학생 대표과의 면담을 받아들이고 새로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대통령은 2명의 학생 대표를 비롯한 5명의 시민 대표를 만났다. 약 한 시간 후에 매카나기 대사가 맥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대통령을 만나러 가고 있을 때 이 대통령의 사임 의향을 비롯한 4개항의 성명이 발표됐다.

매카나기 대사와 맥그루더 사령관이 이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 참석한 한국 측 인사들은 4개항 성명에 대한 미국의 즉각적인 지지를 표명해줄 것을 요구했다. 대사는 이 대통령이 물러날 때가 됐다고 지적하고 선거와 그 이후의 사태와 관련 국민들의 경찰에 대한 분노에 응답하는 어떤 성명이 있어야 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과 측근들은 이 4개항의 구체적인 실천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매카나기 대사는 면담을 마치고 돌아와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국무부의 지침에 따라) 성명에 대한 구체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이대통령과 행정부가 4개항을 실천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하고 정부가 경찰을 쇄신할 것이라는 ‘5번째 성명내용’을 추가했다.

이틀 후 이 대통령은 물러났다. 이기붕과 그 가족은 자살했다. 허정(그가 그전에 내각에 임명됐을 때 미국은 진심으로 환영했다)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존경을 받고 비교적 비정치적인 인사들이 임시 내각에 임명됐다.

짧고 혼란했던 의원 내각제 민주주의가 61년 5월 16일 갑자기 막을 내렸다. 한국 정치에서는 보기 드물게 신속하고 비밀스런 행동으로 박정희(朴正熙)장군과 소수의 야전군 및 해병대가 새벽에 주요 정부 건물과 언론을 장악했다.

장면 정부는 저항이라고 할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장면 자신이 먼저 숨어 버렸다. 61년 5월 16일 새벽 3시32분(한국시간) 미국 정보기관은 새벽1시께 쿠데타가 시작됐다고 보고했다. 새벽 몇 시간 동안 장도영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맥그루더 유엔사령관에게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한 미군의 도움을 요구했다. 맥그루더 장군은 그의 권한은 외부의 안보문제에만 관련돼 있다면서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맥그루더는 합법정부를 지지하는 장면 정부의 의도를 지원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샬 그린 대리대사는 새벽 5시 국무부에 보고하면서 “우리는 물론 이곳에서 합법적인 당국만을 지지할 것이고 이를 분명히 할 것이지만” 맥그루더 장군의 결정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장 총장은 의견을 타진하기 위해 군 지휘관들을 서울에 불렀다. 그러나 미국의 건의에 따라 이한림 당시 1군 사령관은 체포될 위험 때문에 부르지 않았다. 장면 부통령이 의사를 타진해본 결과 군부의 충성이 확고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장면 부통령은 쿠데타에 동조하고 나중에 군사정부의 명목상의 우두머리가 됐다.

맥그루더 장군은 군 지휘관들에게 합법정부를 지지하라는 공개 성명을 냈고 마샬 그린 대리대사도 공개적으로 이를 지지했다. 이 성명들은 미군방송으로는 나갔으나 검열 때문에 장면을 지지하는 신문을 제외하고는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5월 16일 저녁 매카나기 차관보는 미국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무모한 군부 세력에 대한 합법정부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념적인 문제가 개입된 것 같지는 않지만 우리의 평가는 쿠데타 기도는 한국의 안정과 위상을 훼손하고 한미양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전문은 국무부는 사태 전모가 명확해 질 때까지 조심스럽게 정관하는 자세를 택했다고 덧붙였다.

쿠데타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된 것이 아니고 장면 정부가 사태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미국 측의 판단은 당시 미국에 있던 여러 한국 인사들의 조언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5월16일 맥카나기 차관보를 방문한 곽상훈 의장은 이 사태가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으며 유엔 사령관이 국가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사태를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어메리컨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송요찬 장군도 국무부를 방문해 이 문제를 상의했다. 이들 한국 인사 가운데 유일하게 최경록 장군만이 쿠데타가 공산주의자들과 연결돼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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