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릇된 정치와 결합하면 해악
긍정적인 애국주의가 부정적인 민족주의로 변질될 우려 있어

BBC 등은 지난달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러시아의 영토는 끝이 없다"는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고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지리학회가 주최한 지리 퀴즈 대회의 우승자 시상식에서 수상자인 9살 소년과 대화하다가 소년에게 “러시아 국경이 어디까지인지 아느냐"고 물었고, 소년은 “미국 알래스카와 접한 베링해협"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푸틴은 소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러시아 국경은 어디서도 끝나지 않는다"고 했고, 곧 이어 “농담이었다"고 말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서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날 시상식은 TV로 생중계됐다. 이에 BBC는 “푸틴의 농담은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 병합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고 논평했다. 100% 농담은 없다는 진실을 감안하면 푸틴의 이날 영토 발언은 러시아 국민의 민족주의를 자극한 일종의 정치적 선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푸틴처럼 오늘날 지구촌에는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정치가들이 부쩍 기세를 올리고 있다. 민족주의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에서 보았듯이 전체주의와 결합하면 다른 민족, 나아가 인류에 해악을 끼치는 괴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민족주의가 효력을 발휘한 최신 사례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 그는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하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공약해 지난 대선에서 미국인 6100만 명으로부터 표를 얻었다. 미국에서 민족주의 또는 인종주의를 정치에 활용하는 사례는 트럼프만이 아니다. 민주당 소속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과거 흑인 청중을 상대로 연설하는 가운데 예비 트럼프정부의 국무장관 후보인 공화당 소속 밋 롬니를 가리켜 “그는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 쇠사슬을 채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트럼프는 얼마 전 영국의 선동정치가 나이절 페라지를 영국 정부가 주미 영국대사로 임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그의 트위터에 올렸다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로부터 “(주미 영국대사에) 빈자리가 없다(그러니 당신의 요청은 헛소리)”는 쌀쌀맞은 대꾸를 들어야 했다. 페라지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브렉시트)를 가결시키는 데 맹활약을 한 영국독립당 당수로 트럼프와 아주 친하다. 

트럼프 당선이 민족주의 득세와 관련해 EU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이민자 추방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당수 마린 르펜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의 유력 주자로 꼽힌다. 여타 유럽인들과 달리 프랑스 유권자들은 세계화와 국제무역에 반대하는 성향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민자가 프랑스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극소수다. 르펜은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유로화에서 탈퇴하고 영국처럼 EU 탈퇴여부를 묻는 국민투표(프렉시트)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EU 단일통화인 유로화는 프랑스가 탈퇴하면 와해될 수밖에 없고 EU 자체도 붕괴될 것이 뻔하다. 유럽 엘리트들은 “고만고만한 유럽 개별 국가들은 EU라는 큰 틀 속에 녹아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줄곧 지녀왔는데 최근 들어 FN 같은 극우 정당들이 힘을 얻으면서 범(汎)유럽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FN과 같은 계열로는 이민 수용에 극력 반대하는 헝가리의 집권 청년민주동맹(피데스), 폴란드의 집권 ‘법과 정의당’, 오스트리아의 극우 자유당을 들 수 있다. 르펜의 FN은 “브뤼셀에는 ‘노’를, 프랑스에는 ‘예스’를”이라는 선전 구호를 사용하는데, 이는 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의 말을 듣지 말고 프랑스 이익을 챙기는 데 힘을 모으자는 호소를 담고 있다. 이는 프랑스 유권자들의 향수, 걱정,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한 혐오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르펜은 자부심 강한 프랑스 사람들의 쇠락을 탄식하면서 프랑스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프랑스에서와 비슷하게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가 증대하는 곳으로 스웨덴을 들 수 있다. 민족주의 정당인 스웨덴민주당(SD)은 2010년 대중의 공포심에 호소하는 기괴한 TV 광고를 내보냈다. 이 광고는 “가난하고 다산(多産)인 무슬림 망명 신청자들이 대거 유입되면 스웨덴의 너그러운 복지체계가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려 제작됐다. 광고 속에는 보행 보조기를 끌고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은퇴자 주택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백인 노파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부르카를 쓴 채 유모차를 끌고나온 무슬림 여자들에게 둘러싸이며 그 여자들은 노파를 때리고 돈을 빼앗아 간다. 최소 한 군데 방송국에서 이 광고 송출을 거부하였지만 해당 동영상은 온라인으로 확산되었다. SD는 현재 스웨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정당들 가운데 하나다. 네덜란드에서는 반(反)무슬림·반(反)이민자 정당인 ‘자유를 위한 정당’의 지도자 헤이르트 빌더러스가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청중에게 네덜란드에서 “모로코 사람이 줄어들기를 원한다”라고 외치도록 부추김으로써 ‘혐오 연설’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2017년 3월 총선이 실시되는데 그의 정당은 현재 지지율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다. 이 정당의 지지율은 빌더러스 재판이 시작된 이래 상승하고 있다.

국가, 시민, 외부세계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건 민족주의에 의존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1789년 혁명을 통해 자유·평등·박애라는 만국공통의 인권을 선언했던 프랑스에서조차 자국민을 우선시하는 극우세력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으며, 많은 국가들이 만국공통적·시민적 민족주의에서 “우리끼리만 잘 살면 그뿐”이라는 식의 개별 국가적 민족주의로 급속하게 이행하고 있는 현상은 우려스럽다. 긍정적인 애국주의가 부정적인 민족주의로 뒤틀리면서 사람들 사이의 보편적 연대가 소수자들에 대한 불신으로 변질되고 있으며 그 소수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지구촌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관용적인 유럽에서조차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점차 변하고 있는 듯하다.

곽상순 언론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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