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미국·자유 진영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

64년 5월 한국 언론, 월남 지원 호소에 우호적 반응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입장이 악화되고 있을 때 한국 측은 병력 지원을 제의했다. 당시 주미 한국대사(양유찬)는 라오스를 돕기 위해 한국군 1개 사단을 파병할 것을 제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7월 브릭스 대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3개 사단을 파병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한국은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아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면서 미국과 자유 진영의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를 촉구했다. 미국의 반응은 이같은 제안을 기술적으로 유보시키는 것이었다.

한국 측은 61년 이같은 제의를 되풀이했는데 박정희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이 월남 파병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개입 없이 한국 측은 가라테(태권도) 교관들을 월남에 보냈다. 63년 한국의 전투병 파병 제의가 뒤따른 데 이어 64년초 김현철 전 내각수반이 개인자격으로 파병 제의를 했다.

이때쯤 미국은 파병 제의에 호의적인 입장을 가졌으나 처음에는 전투부대보다는 기술자, 의료진의 파견을 권장했으며 그 이유는 그 당시 전쟁 상황이 그 같은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64년 5월 한국 언론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자유 진영이 월남을 지원해야 한다는 호소에 즉각적이고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국 정부도 군대 파병을 원했다.

한국 측의 파병 제의 동기는 복잡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제의에는 이미 언급한 방침을 따라 공산주의를 격퇴해야 한다는 진지한 요구가 있었다. 여기에 한국동란 당시 미국과 자유 진영에게 진 빚을 갚을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을 환영했다.

좀더 계산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한국은 미국의 재정적·군사적 지원과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 측면에서 이 기회를 미국에 대한 지렛대를 높이는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후자의 측면은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다가옴에 따라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더우기 전투 경험을 얻고 상당한 양의 미국 달러를 벌어들일 기회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64년 중반 미국 관리들은 한국과 월남 정부의 협의 노선에 따라 한국 측에 이동병원(MASH)을 월남에 보내줄 것을 제의했다. 월남 정부로부터 필요한 요청을 받는 절차를 거친 후에 한국은 병원부대를 파견했다.

한국정부는 계속 전투부대 파병을 희망했으나 미국은 그같은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2월 미국은 한국 측에 2천명에 달하는 전투기술병과 수송부대로 구성된 특별부대를 파견할 것을 제의했다. 한국정부는 이 조치에는 국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검토했다.

버그대사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이끄는 야당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한국 야당은 이 조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65년 1월26일 국회의 승인이 있었고 야당과 언론이 “마지못해 승인하는” 가운데 군대가 파병됐다.

미국은 여전히 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것이 월남군이 약화됐다는 추측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를 계속했다. 미 대사관은 이에 따라 월남에 파병되는 한국군 보병부대는 한국군 안전 외의 다른 전투 역할을 맡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한국 정부에 강조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65년 4월 월남전 전황은 증원부대가 필요할 지점에 도달했다. 주월미국대사(헨리 캐보트 로지)는 이같은 방침에 따라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박 대통령에게 가는 메시지를 중계했다.

5월에 한국 측은 월남 정부로부터 미국과의 조정이 되지 않은 듯한 모호한 성격의 전투부대 지원 요청을 받았다. 한국은 이 기회를 자체의 희망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또 박 대통령이 임박한 워싱턴 방문에서 얻을 수 있는 양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포착했다.

그 후 몇 개월 동안 월남정부의 요청으로 전투사단을 파병하는 공식절차가 이루어졌다.

한·일회담을 둘러싼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동의가 다시 이루어졌으며 9월에는 파월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여했다.

9월에 실시된 한국정부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파병 문제를 알고 있는 조사대상자의 57.6%가 이 파병 조치를 찬성했다.

(미국) 대사가 한국군 전투사단의 파병을 평가하면서 지적했듯이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한미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추가했다.

미국과 자유진영의 이익에 대한 한국의 자발적인 기여는 한국이 미국에 대해 다양한 종류의 군사 및 경제적 원조를 요구하는데 힘이 됐으며 실제 미국과 한국의 군병력을 감축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중단시켰다.

직접적인 유지비용에서만 본다면 65년 6월 미국이 최초의 한국군 전투연대에 지급한 연간 예산이 2백70만달러에 달한 것으로 추산됐다.

이같은 비용을 비밀로 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한국 국방장관이 국회에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용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암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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