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년간 사돈집안으로서 우애를 다져왔던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일가와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명예회장 일가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두 집안의 다툼은 결국 노골적인 감정싸움으로 번져 범현대가의 내분으로 비화됐다. 정 명예회장은 애초 “외부세력의 M&A 위협으로부터 현대를 지켜주겠다”고 현대 지분 매입 취지를 밝혔지만 이제는 “현대가 김문희 여사 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겠다”며 현대그룹 인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해 고 정몽헌 회장의 상속자(정영선) 외에 사돈 식구들에게 경영권을 넘길 수 없다는 것.“현대 경영권을 현회장 아들에게 넘긴다”는 정상영 명예회장의 진의만을 놓고 볼 때 ‘현정은 회장은 손해볼 것이 없다’는 데 범현대그룹 관계자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물론 모친인 김문희 여사나 부친 현영원 회장을 넓은 의미의 가족으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자식(정영선)의 미래를 생각하면 득실의 접근법 자체가 달라지게 된다.이와 관련해 범현대그룹 계열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흥미로운 얘기가 오가고 있다. 정 명예회장 쪽에서 지분 매입에 대해 위와 같은 취지를 현 회장에게 설명했고 현 회장도 이를 이해하는 듯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정 명예회장의 설명 속에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었고 그것을 현 회장이 읽어냈다는 의미로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그룹 역사의 한 축인 ‘가신그룹’이 또 다시 고개를 들었다는 얘기다.

범현대그룹 계열사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현대그룹 경영권 향방에 관해 정상영 명예회장을 비롯한 정씨 일가의 가족회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는 정 명예회장이 최근 언론에 밝힌 ‘정영선 후계론’을 현대그룹 경영권 흐름의 큰 틀로 채택했다고 알려졌다. 이 결과가 현정은 회장에게 통보가 된 것은 물론이고 현 회장이 가족회의에 직접 참석한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가족회의 결과 ‘정영선 후계론’ 확정

일부 범현대 관계자들은 현정은 회장 일가에 현대엘리베이터를 그룹에서 계열분리 해나갈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현 회장이 참석한 회의 자체의 신빙성은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 얘기에서도 역시 그룹 후계자는 정영선씨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고 알려졌다.위 관계자에 따르면 ‘현대엘리베이터 분리안’이나 그룹 전체 경영권 향방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당분간은 정씨 일가가 경영권을 쥐고 경영을 하되 정영선씨가 성인이 되었을 때 경영권을 물려준다는 것이 회의의 골자인 것 같다.현대가(家)에서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여자가 경영에 나선 적은 없었다는 것이 정씨 일가가 경영에 나서겠다는 명분이 됐다.

여기에는 김문희 여사나 현영원 회장을 배제하려는 의도도 함께 내포돼 있다. 남은 것은 현정은 회장의 결심. 범 현대 관계자는 “현정은 회장도 정씨 일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그러나 그동안 현정은 회장의 발언이나 행동은 이같은 내용과는 정반대로 진행돼왔다. 현 회장은 오히려 김문희 여사와 보조를 맞춰 정상영 명예회장에 맞서온 것이다. 범현대 관계자는 “그 사이의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정은 회장이 심경 변화를 일으킬만한 계기가 있었다는 얘기.

■가신그룹의 대반격

이 관계자에 따르면 현대그룹 가신들이 현 회장의 마음을 돌리는 데 일정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현대그룹은 이를 부인하고 있지만 과거 ‘왕자의 난’ 때 MH계열에서 활약하던 주역들이 아직 그룹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낭설로만 보이지는 않는다.이들은 “현 회장이 그룹을 잘 이끌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고 “삼촌(정상영 명예회장)의 말은 제대로 걸러서 들어야 한다”며 독자 경영의 필요성을 각인 시켰다고 알려졌다. 차츰 정상영 명예회장의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된 현 회장은 가신 경영진의 말에 따라 정 명예회장과 대립 노선을 걷게 됐다는 것이다. 현정은 회장에게 결정적인 동요를 일으키게 한 사람들은 A 사장과 B 사장으로 알려졌다.

A 사장은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불러왔던 2000년 ‘왕자의 난’ 당시 MH를 최측근에서 보필했던 인물이고 B 사장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MH의 심복으로 지난 2001년부터 그룹 내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이들 가신 경영진은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그룹 인수 의사를 밝히면서 “현대그룹의 가신경영을 청산하겠다”고 말한 데 불안감을 느껴 현 회장을 부추긴 것으로 정씨 일가측은 보고 있다. 그 결과,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경영권을 잡게 되면 물론이거니와 현정은 회장이 경영권 수호에 성공하더라도 정 명예회장이 대주주로서 정 명예회장측 경영진을 투입시키거나 경영진 교체를 요구할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가신경영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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