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씨의 한국으로의 갑작스런 망명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간의 사활을 건 체제경쟁에 있어서 우위의 깃발을 대한민국 쪽으로 확실하게 안겨준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철통같은 공산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는 권력의 누수와 균열의 일단을 보여주었으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만천하에 일깨워주었다. 1925년 함경북도 주을에서 태어난 황장엽씨는 1952년 모스크바 종합대학으로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4년 10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강좌장이 되었으며, 1958년 과학원 사회과학부문 위원이 되었다.

그는 1959년 12월 북한에서 매우 중요한 부서인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65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었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된 그는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국 사상담당 비서로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론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또 1993년 조선노동당 비서국 국제담당 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바 있다. 황장엽씨는 1997년 1월30일 일본 국제문제연구협회가 주최한 김일성 주체사상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한 후 귀국하는 길에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에 머무르던 중 북한의 려광무역연합총회사 사장 김덕홍씨와 함께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2월 12일 갑자기 찾아들어 망명을 요청했다.

이 돌연한 사태를 맞은 한국정부는 즉시 황장엽씨 일행의 망명 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이 사실은 세계적인 통신사들에 의해 긴급 뉴스로 타전돼 지구를 흔들었다. <조선일보>는 황씨의 망명이 이루어지기까지 과정과 황씨의 비밀편지 등을 특종으로 보도했다. 한반도의 동향에 예민한 주한미군 방송은 “침묵을 지키던 북한의 외교부는 황장엽이 납치되었으며 그런 망명은 ‘상상할 수 없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이 방송은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이 망명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황장엽은 북한 독재자 김정일과 인척간입니다. 또한 상임위원이자 각료인 데다 북한 공산체제의 통치이론인 주체사상(철저한 자급자립 이론)을 정립한 핵심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황씨의 망명은 수수께끼입니다”라고 전했다. 중국은 이 예민하고도 중대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만만디정신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발등의 불’이 되어버린 황씨의 망명을 저지하려는 북한 정부의 기민하고도 필사적인 움직임과 그의 선택을 중대 사안으로 해석하며 망명의 허락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정부 사이에서 심사숙고하는 가운데 한 달여만인 3월 18일에 황씨와 김씨를 필리핀으로 이송한다고 발표했다. 황씨 일행은 필리핀의 모처에서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32일 동안 머문 후 망명을 요청한지 67일만인 4월 20일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한 권력의 실세요, 주체사상의 창시자요, 북한에서는 상대적으로 리버럴했던 황장엽씨의 망명은 여러모로 세상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그것은 6·25전쟁 중 미군에 소속된 북파 특수공작부대인 KLO부대의 간부로서 공을 세웠던 이연길씨와 황씨의 측근 김덕홍씨의 합작품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연길씨는 중국에 있는 북한의 외화벌이 수단인 려광무역연합총회사 사장 김덕홍씨와 중국에서 만나 북한의 민주화에 관해 의견을 나누며 동지관계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1년에 두차례 정도 외국을 순회하면서 베이징을 다녀가는 황장엽 비서를 소개했다. 1월 30일 도쿄에서 열린 주체사상 세미나를 끝낸 황장엽씨는 그 자리에 참석한 이연길씨와 악수하면서 똘똘 말린 종이쪽지 하나를 쥐어주었다. 거기엔 “북경에 차를 꼭 대기시키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그것은 황비서가‘망명(亡命)’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이연길씨는 급히 북경으로 건너가 김덕홍씨를 만나 황장엽 메모를 전해주고 구체적인 망명 준비에 착수했다.

황비서는 도쿄에서 베이징으로 건너가 통상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척하면서 이연길, 김덕홍씨가 공작한 시간표에 따라 기회를 엿보다가 2월 11일 대기시켜놓은 승용차를 타고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직행했다. 그리하여 ‘걸어다니는 주체사상’으로 일컬어지는 황장엽씨와 맥주 잔을 두 손으로 잡아야 할 정도로 손이 떨리며, 한쪽 귀가 어두운 70대 노장 이연길씨의 결단은 <워싱턴포스트>지가 지적했듯이 “소련에서 공산주의의 시조인 마르크스가 탈출한 것과 같으며, 자유주의의 신봉자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을 버리고 망명한 것과 같다”고 보도할 정도의 충격적인 이 망명사건을 이루어냈다.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여 정보기관의 보호를 받게 된 황장엽씨는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를 통해 등장한 김대중 대통령이 이른바 ‘햇볕정책’을 강조하면서 국민의 혈세로 이루어진 거금을 비밀리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공하고 남북한 정상회담을 성취한 후 노벨평화상을 받는 등 친북한 노선 내지는 대북 유화 제스처를 쓰는 동안 ‘감시’ 또는 ‘반감금’에 준하는 홀대를 받았다.

그는 이 점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을 토로했지만 자신에게 씌워진 보이지 않는 족쇄는 풀리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황장엽씨는 1994년 조선노동당 군수담당 비서 전병호씨로부터 들은 진술을 토대로 북한의 핵실험 계획을 폭로하여 세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황씨는 <월간중앙> (2002년 11월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현재 상태에서 핵무기가 있는가, 없는가를 증명하러 다니는 것은 나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고 “그건 (북한) 고위층에서는 상식으로 돼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 핵위기가 조성되고 북한 고관들이 실토한대로 북한의 핵개발 사실은 세계적으로 공인이 됨으로써 황씨의 발언은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2003년 6월20일 밤 일본의 아사히 텔레비전 심야 종합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한 황씨는 북한을 붕괴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북한의 인권문제를 폭넓게 국제사회에 알려, 북한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일”이라고 유창한 일본어로 강조했다. 그는 이어서 “북한이 핵무기,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은 대의명분이 되지 않으며, (인권을 무시하는 북한이라는) 범죄집단을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대의명분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날 “이런 전략을 토대로 북한의 내부 붕괴를 촉발할 수 있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 상하이같이 번성한 탈북자 촌을 조성하는 일이며, 이 곳에서 많은 원조물자를 북한주민들에게 직접 보낼 수 있다면 북한은 붕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그는 “김정일이 직접 관리하는 사람은 불과 2~3백명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북한 대중들이 움직이게 되면 북한은 붕괴하게 되어 있다”고 덧붙였다.황장엽씨는 망명 직후부터 미국 디펜스포럼 재단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려 했지만 한국 정부의 방해를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2003년 10월 27일부터 8일 동안 미국 워싱턴에서 연설할 기회를 맞았다. 그가 미국을 향해 떠나기 전 한총련 등 친북성향의 단체 조직원들이 그의 출국을 막을 결사대를 조직하고 그를 ‘배신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방미기간에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당국자들을 비롯해 미 상하 양원 의원, 학계 및 교민 관계자들과 폭넓게 접촉하고 북한 실태와 북핵 현안에 대한 소신과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해 미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황씨는 워싱턴에서 역설했다.“나도 나름대로 북한의 변화를 희망한다.

소떼를 북한에 몰고 갔을 때도, 금강산 관광길이 열렸을 때도 다들 큰‘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무엇을 기준으로 변했다는 것인가. 변화란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데 있어서 어떤 기준을 말해야 하지 않는가. 북한의 본질적 변화란 독재제도의 제거다. 독재 그 자체가 복잡하고 많은 것을 포함한다. 수령 절대주의적 독재를 배제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황장엽씨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적지 않은 교포들이 북한 망명정부의 수반이 되기를 그에게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의를 “나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거절했다.

“나는 결코 망명한 적이 없고, 대한민국에 온 것은 내 조국에 온 것이다. 김정일 제거에 미국의 도움이 중요하다고 내가 미국에 살겠는가?”그러나 그의 거듭된 부인에도 북한 망명정부 수립에 대한 촉구성 질문이 이어졌다. 이에 황씨는 “대한민국은 우리 민족의 정부이고, 민족의 정부가 있는데 망명정부가 왜 필요한가”라고 반문하고 11월 5일 ‘조국’으로 돌아왔다. 부시 대통령은 11월 6일‘민주주의를 위한 기부금재단’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황씨의 독재체제 제거론과 같은 ‘압제전초기지’(outpost of oppression) 진격론을 폈다. 즉 부시는 북한, 쿠바, 미얀마, 짐바브웨를 “미국의 민주주의 의지가 시험받고 있는 나라”즉‘압제전초기지’라고 주장하고“언젠가는 수용소, 교도소, 망명지 등에서 새로운 민주주의 지도자가 떠오를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