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워싱턴, 한국전 핵무기 사용 용의 있어

회담 이후, 1949년 전투기자재 북한에 제공

한국전쟁과 관련, 소련 군사대백과사전에는 「한국전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타도하고 한반도를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을 침공할 발판으로 만들기 위해 남한과 그 배후의 미국에 의해 저질러졌다. 침공계획은 1949년 5월 미 군사고문단과 남한 측 사령부에 의해 작성됐다...」로 기술돼 있다. 그러나 스탈린의 비밀문서철을 보면 전쟁준비와 개전의 진상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스탈린은 2차 대전후 서방뿐만 아니라 동방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동방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는 모택동이 국민당을 타도했고 몽고와 북한의 공산화에 대해서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당시 평양의 젊은 지도자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 사회주의 건설의 눈부신 성과를 얘기하면서 자신을 모스크바로 불러주기를 요청했다.

어느날 스탈린은 집무실에서 비서에게 “핵 실험준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베리아에게 오늘 저녁 보고하도록 하게... 그리고 비신스키(외무장관)에게 평양에 답장을 보내서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에 동의한다고 전하도록 하게... 그를 가까이 불러 정확한 사정을 알아봐야겠어” 그런 지시가 있은 후 1개월 반이 지난 1949년 3월 5일 스탈린은 김일성을 만났다.

1시간반 동안 계속된 양인의 대화에서 북한에 제공할 군사원조의 성격, 소련에서의 북한장교 양성, 북한전력증강, 경제관계 등이 논의됐는데 스탈린은 김일성의 모든 요청을 수용한다고 말했다. 아직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 회담이후 1949년 소련군비와 전투기자재들이 북한에 제공됐다.

1950년 1월 19일 평양주재대사 슈티코프대장이 스탈린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전문을 보냈다. 극비로 분류된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녁에 중국대사 귀국과 관련하여 중국대사관에게 환송연이 개최됐다. 그 파티에서 김일성은 본인에게 말하길 중국해방이 끝나가는 지금에 와서 조선해방이 절박한 문제다. 이는 빨치산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통일문제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다. 모택동은 남침을 삼갈 필요가 있다면서 이승만이 북침의 길에 접어 들게 되면 반공(反攻)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김일성은 스탈린 동지에게 남침 허가를 받고자 한다. 그는 남침 허가에 관해 스탈린에게 직접 보고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술이 반쯤 취한 김일성은 이날밤 여간 흥분한 상태가 아니었다. 1950년 1월 19일 슈티코프」

스탈린은 이 보고를 받고 1주일 이상 심사숙고한 끝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모택동에게 암호전문을 보냈다. 모택동은 “승리에 자신이 선다면 그 문제를 논의해보자”며 반신반의한 답전을 보냈다.

평양 측은 스탈린의 전문을 남침 승리가 보장되는 경우 전쟁 개시에 동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슈티코프는 김일성을 만난 후 2월 4일 비신스키 외무장관을 통해 스탈린에게 또다른 보고서를 보냈다. 이 보고서에서 김일성은 보병사단을 10개로 증강하기 위한 차관제공을 요청한 것으로 밝혔다.

마침내 스탈린은 북경과 또 한 차례의 협의를 거친 후 2월 9일 평양으로 보낸 전문에서 한반도에서 대규모 작전을 준비하는 데 대해 동의하면서 무력적화통일을 꿈꾸는 평양의 의도에 찬성했다. 이 날이 사실상 남침준비의 정식 시발점이었다. 소련의 탱크, 대포, 보병무기, 탄약, 의료품, 원유 반입이 활발히 진행됐으며 북한군 참모부에서는 극비리에 소련군사전문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방대한 규모의 공격작전 계획이 작성되고 있었다.

전쟁준비가 본격적 단계에 접어들고 있을 때 스탈린은 다시 한번 북경과 의논해 보기로 했다. 매사에 용의주도하고 의심이 많은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보내는 지급 전문에 자기 이름 대신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썼다. 1950년 5월 스탈린이 비서에게 받아 쓰게 한 전문은 다음과 같다.

「긴급; 모택동에게 필리포프와 그의 동지들은 북한동지들과의 담화에서 국제정세가 변동된 현 상황에 북한의 무력통일 계획에 동의하려는 용의를 표명했다. 여기서 문제는 북한과 중국동지들의 공동합의에 의해 최종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 중국동지들이 이에 이의가 있을 경우 문제해결이 다음 번 논의때까지 연기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동지들이 담화의 구체적 내용을 귀하에게 알릴 것이다. 회답을 전신으로 보내주기 바란다. 필리포프」

북경은 이내 동의했다. 그리하여 전쟁 준비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슈티코프는 5월30일 모스크바로 긴급 전문을 쳤다.

이 전문에는 「김일성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군 총참모장이 소련군사고문관 바실리예프와 함께 원칙적인 공격작전 계획을 완성했다. 그리고 김일성이 그 작전 계획을 승인했다. 한국전 준비가 6월 1일에 끝날 것이다. 10개 사단 중 7개 사단이 공격작전을 위해 준비를 갖췄다. 7월이면 장마가 시작된다. 북한군 총참모부는 6월 말에 공격을 시작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본인의 견해로는 그 기일에 동의할 수 있다. 긴급 지시를 바란다. 1950년 5월 30일 슈티코프」로 돼 있다. 스탈린은 이 전문에 자필로 “나는 귀하의 견해에 동감이다”고 표기했는데 서명난에는 기묘하게도 당시 제1외무차관이었던 그로미코의 이름을 사용했다. 스탈린은 또 6월20일 해군담당군사고문단을 보내달라는 김일성의 요청이 담긴 슈티코프의 전문에 대한 답전에서는 ‘핀시’(FIN SI)라는 수수께끼와 같은 가명을 쓰기도 했다. 스탈린은 그후에도 계속 해서 이러한 가명과 그로미코이름을 빌어 지시를 내리고 서울이 함락된 후 바실리예프 장군이 서울로 가서 북한의 작전을 돕겠다고 한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의 이같은 태도는 한국전쟁에 그가 직접 참여한 사실이 폭로될까봐 우려해서 나온 것이었다.

9월 중순까지 북한군은 불의의 공격을 이용,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스탈린은 벌써 김일성을 승리자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러한 무지개꿈이 일조에 수포로 돌아갔으며 마침내 중국과 소련의 직접적 원조 없이는 북한이 지탱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10월 1일 박헌영(당시 외무장관)이 스탈린에게 보내는 김일성의 긴급서한을 슈티코프에게 전달했다. 이에 소련독재자는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제3차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을 불사하고 참전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 전문의 중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월감에 사로잡힌 미국이 대규모 전쟁에 말려들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도 교전국이 될 수 있으며 중국과 동맹조약으로 결속돼 있는 소련도 전쟁을 피치 못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힘을 합칠 경우 미국, 영국 및 유럽자본주의 국가들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다. 패전국 독일은 지금 미국에 아무런 지원도 할 수 없으므로 전력이 문제될 수 없다.

만약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차라리 몇 해 후보다 지금이야말로 개전이 필요할 수 있다. 몇해가 지나면 미국동맹국으로서의 일본 군국주의가 부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남북대결이 거의 3차대전으로 달음질치는 끔찍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오늘날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워싱턴은 한국전이 위기일발의 상황에 처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용의도 있었던 것이다.

이미 한국전에 관심을 잃은 스탈린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 전쟁을 그만두기로 하고 외교적 차원에서 평화 정착을 발의해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방책을 취하도록 비신스키 외무장관에게 지시했다. 스탈린의 임종까지 반년도 못 되는 시일이 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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