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멀어졌다. 낙엽이 떨어진 자리 나뭇가지에 남아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건, 차가운 바람이 맴도는 생기 없는 산과 들 그리고 바다뿐.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따뜻해지고 싶은 욕심만 점점 늘어간다. 그런 중에 찾아갈 만한 곳이 생겼다. 부안의 겨울 문턱으로 스며들었다.

전라북도 부안군은 그 이름 보다는 변산반도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땅이다. 한쪽으로는 산이 병풍처럼 서있고 반대쪽으로는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 변산반도의 절경이 국립공원의 지위를 얻어 우리의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안은 예로부터 물고기, 소금, 땔나무가 풍부해 부모 봉양하기에 좋은 곳이라 해 ‘생거부안’이라는 찬사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시대를 막론하고 살기 좋은 땅으로 또 자연이 빚어낸 보물이 가득한 곳으로 이름을 떨쳤기 때문인지 부안의 기운은 늘 온화하고 평안하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하나하나에 겨울을 녹일만한 온기가 스며있고 아늑함이 묻어있다. 옅은 채색이 덧칠해진 오래된 수묵화를 닮은 그 풍경 위를 걷고 또 바라보다 보면 겨울의 산과 바다는 다시금 생기를 찾아가는 듯 내속에서 살아난다. 그 너머로 산사의 새벽 예불 소리가 들려오면 겨울잠에서 잠시 깨어난 미물들의 맑은 눈망울이 우리의 마음속에 소리 없이 담겨진다.

여전히 푸르른 천년 사찰, 내소사

내소사를 너른 품으로 감싸 안은 능가산의 입구에서 일주문을 지나자 전나무 숲길이 길을 안내한다. 계절의 냉정함도 이곳의 푸르름 앞에서는 그 힘을 잃었는지 숲길은 여전히 신선하고 상큼한 자연의 향내를 은은하게 내뿜는다.

잠시 땅을 적셨던 단 비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길은 자그마치 600m나 이어져 ‘함께 나누고픈 숲길’로 선정된 이유를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길의 끝에서 마주한 천왕문 안으로 천 년의 역사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절의 한가운데에 늠름한 모습으로 우뚝 선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긴 세월을 말없이 얘기해주고 있다. 베일을 벗은 듯 느티나무 뒤로 펼쳐진 내소사의 풍경이 훤히 드러났다.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맑아진 머리가 더욱 시원해지는 순간이다.

아담한 내소사 삼층석탑 뒤로 오래된 목조건물이 특유의 따스한 기운을 물씬 풍겨 온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보물 제 291호 내소사 대웅보전이 전하는 화려하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이다.

못을 쓰지 않고 오로지 나무만으로 지어진 이 법당 앞에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감탄사를 자아낸다. 대웅보전의 꽃 문살에 반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탄성소리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우리나라 장식무늬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는 이 꽃 문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절묘하게 맞추어 나간 연속문양 솜씨 때문인지 연꽃과 수련 잎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법당 안에서 문을 되돌아보면 꽃무늬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정갈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이 비쳐든다. 그 신기함에 취해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다. 템플스테이라고 쓰인 팻말이 또 다시 발걸음을 붙잡는다. 짧은 시간의 여행이었지만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고 싶은 마음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스님 한분을 찾아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본다. 선뜻 내어 주는 뜨거운 차 한 잔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겨울이라 따뜻함이 깊이 느껴지는 하룻밤이 더욱 그립다.

내소사 템플스테이
 
바다와 호수가 좌우에 펼쳐지는 능가산 능선을 따라 트레킹을 즐기면서 대자연을 감상하는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사람과 사찰 그리고 자연이 하나가 되어가는 시간, 자연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가만히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다.

<프로그램 안내>
모든 프로그램은 내·외국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 휴식형 템플스테이
저녁예불시간, 새벽과 공양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자유로이 수행정진하면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몸의 피로를 푸는 프로그램으로 365일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

● 행복나눔 가족형 템플스테이
예불시간저녁, 새벽과 공양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자유로이 가족들과 수행정진 하면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몸의 피로를 푸는 프로그램으로 3인 이상, 5인 이하 가족이 신청 가능하고 항시 운영된다.

● ‘참 나’를 찾아서 트레킹 템플스테이
참선, 걷기 명상과 결합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으로 2박 3일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트래킹내변산→직소폭포→내소사, 108배 및 참선 등이 포함eho 있다. 최소 인원 6명 이상 시 진행되며 주말에만 가능하다.

젓갈에 따뜻한 흰밥 한 그릇, 곰소항

바다의 짠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곰소가 눈앞이다. 곰소항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먼저 곰소염전에 들렀다. 계절 탓인지 부연 하늘 탓인지 염전에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업 도구들과 고요만이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바다는 보이지 않고 눈앞에는 산과 들판만이 휑하게 펼쳐져 있다. 

특이하게도 염전 옆으로 자동차들마저 쌩쌩 달리고 있어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모습이다. ‘대체 바닷물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낡은 나무 수로에 있다. 바닷물을 끌어와 그곳에 가둔 후 바람과 햇빛에 말려 소금을 만들어낸다. 

곰소염전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천일염 생산지로 이렇게 생산한 소금을 일 년간 저장해 간수를 완전히 제거한 다음 상품으로 내보낸다. 깊은 맛이 있고 쓴맛은 덜하다고 소문난 곰소 소금의 비결, 또 곰소 젓갈을 대한민국 최상품으로 만들어낸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곰소염전에서 얼마 가지 않아 갈매기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니고 어선들이 삐딱하게 정박해있는 곰소항이 나타났다. 항구 앞은 호수를 닮은 잔잔함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낀다. 
 
한때 전라북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였던 곰소항에는 아픈 기억이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땅에서 거둔 곡식과 소금 등이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눈앞의 곰소항은 여전히 그 슬픔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항구 입구에는 어시장의 난전들이 늘어섰다. 앞바다에서 이제 막 잡아 온 것 같은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들이 내 마음이 그렇듯 차분한 모습으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항구 여행의 즐거움은 이런 어시장에서 맛보는 횟감에 있지만 곰소항 만큼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이곳에는 회보다 맛있고 다양한 종류의 젓갈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항구 인근에서는 어디서나 시뻘건 젓갈을 내놓고 파는 상점들을 쉽게 볼 수 있어, 끊임없이 입맛을 다시게 된다. 아직 식사 때가 안됐지만 허기가 밀려들었다. 
 
우리나라 3대 젓갈 시장으로 꼽히는 곰소에서 맛보는 젓갈정식은 말 그대로 밥도둑. 상에 차려진 젓갈을 미처 다 맛보지도 못했는데 이미 따뜻한 흰 밥 한 그릇은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의 고민도 없이 밥 한 그릇을 또 시키고 말았다.

겨울바다의 포근함, 변산 해변

예로부터 변산의 바다는 해안가의 명승과 절경으로 그 소문이 자자했다. 휴일이 넉넉한 날이면 그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찾아온 이들의 발걸음이 해안가를 따라 줄줄이 이어진다. 널찍한 평화가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뜨거워지고, 바다를 감싸 안은 기암절벽의 풍광 앞을 거닐면 절로 마음이 포근해진다. 

이곳을 찾는 때면 늘 그래왔지만, 겨울의 문턱에 닿아있는 이번 여행에서는 그 마음이 한결 더 두터워져 간다. 한갓진 오후 변산 해변을 따라 여유로운 산책길에 나섰다. 대명리조트에서 채석강까지 걷는 길, 홀로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인어상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쓸쓸함이 짙게 드리워진 그 뒷모습에서 변산 바다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변산의 겨울바다라면 왠지 그녀처럼 한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두터운 겨울옷을 입은 아이들도 추위에 아랑곳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포말을 맞이하며 바다를 바라본다. 그렇게 길은 채석강에 닿았다. 

세월을 짐작할 수 없는 바람과 파도가 지금 도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곳. 보이지 않는 그 열정에 말없이 박수를 보내본다. 암석들로 뒤덮인 채석강 앞을 걸으며 작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둘러본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특별함이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내민다. 

변산의 바람과 파도는 육지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는지, 참 세밀하게도 자신의 자취를 남겨놓았다. 아주 먼 미래에 다시 한 번 이곳에 올 수 있다면 좋겠다. 그 때는 더욱 둥글둥글해진 채석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절벽 사이에서 작은 해식동굴을 발견하고 궁금한 마음에 동굴 안으로 들어가 바다를 바라봤다. 어둠 때문인지 무언가가 기다려진다. 

그것은 언젠가 봤던 이곳에서의 저녁노을인 것 같다. 겨울이라는 단어마저 잊게 해줄 뜨거운 노을빛에 물든 변산의 바다에서 하룻밤 머물다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기다릴 수 없는 처지만 원망할 뿐이다.

<info> 주변 명소 

채석강
중국의 시성 이태백이 뱃놀이를 하며 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 숨졌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중생대의 백악기 약 7000만 년 전에 퇴적한 해식단애가 마치 수 만권의 책을 쌓은 듯한 와층을 이루고 있어 자연의 신비를 만끽할 수 있다. 하루 두차례의 썰물 때에는 퇴적암층에 붙어 있는 바다생물들과 해식동굴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해식동굴에서 바라보는 변산반도의 낙조와 노을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적벽강
채석강에서 북쪽으로 약 1㎞의 백사장을 따라가면 적벽강에 이르게 되며, 후박나무 군락지가 있는 격포리로부터 용두산을 감싸는 약 2km의 해안선을 일컫는다. 기괴한 암벽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절경을 이루는 이곳의 아름다움은 중국의 시인 소동파가 놀았던 중국 황주의 적벽강과 비유되곤 한다. 만물의 형상을 한 붉은 색의 기묘한 바위, 높은 절벽과 동굴은 조물주의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것만 같다.

추위를 잊은 산중의 밤, 개암사

부안의 또 다른 천년 고찰 개암사에서 마침 템플스테이가 있다는 소식이 왔다. 유홍준 교수가 ‘적막함이 마음에 들어 개암사에서는 누구의 것도 아닌 내가 될 수 있고, 나만의 속도로 인생 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한 그 곳. 그곳에서 하룻밤을 함께하며 소중한 추억 하나를 만들고 가기로 했다. 

저녁 5시 템플스테이가 시작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개암사의 너른 마당 뒤로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개는 더욱 깊어져갔다. 무사히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오늘 템플스테이를 체험할 학생들이 도착, 정갈하게 개어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한자리에 모였다. 조금은 어색한 표정의 학생들은 가장 먼저 사찰 예절을 배우며 조금씩 긴장을 풀어갔다. 마음의 긴장은 풀렸는지 몰라도 자세는 곧고 바르게 펴지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의 걱정도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녁 공양이 끝나고 이른 잠을 청하기 전 스님과의 차담이 이어졌다. 처음일지도 모르는 차 한 잔을 마시며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의 얼굴에 그 나이 때의 장난기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고, 짝을 지어 친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통해 서로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함께 하룻밤을 지낼 친구들끼리 서로의 기운을 주고받으며 그 시간만큼은 하나가 돼 서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야식으로 준비된 삶은 고구마는 그들의 가슴을 좀 더 따스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새벽 4시, 이른 새벽의 한기가 스며든 본당에 가부좌를 틀고 앉자 눈가에 남아있던 졸음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학생들도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며 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마음의 평정을 얻어가는 모습이 사뭇 감동스럽기까지 한 모습. 가랑비가 내리는 어두운 숲속을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앞 사람의 발만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발걸음의 무게는 청량한 나 무향과 함께 갈수록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숲속에서 경험하는 명상의 시간은 언제든 다시 만끽하고픈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색다른 하루의 시작은 이어지는 낯선 프로그램도 기꺼이 즐겁게 만들어줬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게 해줬다. 때문에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순진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시간, 나는 조용히 어제 가져온 마음속의 근심을 내려놓았다. 추위에 대한 근심, 더욱 따뜻하길 바라던 욕심이 썰물처럼 모두 사라졌다. 겨울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개암사 템플스테이

마음의 평화를 위한 고즈넉한 산사에서의 휴식형 템플스테이 산사유거를 상시 운영하고 있다. 우금암 트레킹, 차 만들기, 스님과의 차담 등 사찰 일상과 관련해 자율적으로 참여하면서 휴식과 체험을 통한 심신의 안정을 체험할 수 있다.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프리랜서 김관수 기자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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