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 거절? “줄 잘 서면 5년이 편하다”

<뉴시스>

[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최순실 실소유 의혹을 받고 있는 K·미르재단에 출연금을 낸 기업 총수들이 줄이어 특검수사를 받고 있다. 이들은 특검에 나와 ‘대통령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지난 18일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은 “뭘 안 주면 안 줬다고 패고, 주면 줬다고 패고 기업이 중간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이 참담하기 그지없다”는 작심발언을 해 주목받았다. 이에 과거 정권에 출연금을 낸 기업에 대한 처우는 어떠했는지 알아봤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출연금을 낸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경영성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는 점이다. 일요서울은 정권별 재벌 총수의 결탁, 그 청산되지 못한 흑역사를 짚어본다

‘대우 신동아 한보그룹’ 정권에 밉보인 대표적 기업들
 재계 “출연금도 뇌물죄라니…”눈치 보며 사업한다 ‘울상’

한국 기업사(史)에 있어서 권력에 밉보인 기업은 살아남지 못했다.
헌정사상 첫 청문회는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 비리를 규명하기 위해 열렸다. 당시 ‘일해재단(현 세종연구소)’에 이목이 쏠렸다. 

일해재단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3년10월 버마 아웅산 폭발사고 유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려던 공익법인에 뿌리를 뒀다. 1984년3월~1987년12월까지 재벌 등으로부터 목표액 300억 원보다 2배 가까운 598억5000만 원의 기금을 모았다. 1988년11월 국회 5공비리조사 특위의 일해재단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일해재단 기금 조성에 강제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정권에 밉보여 문 닫은 비운의 기업들

당시 전두환 정권의 비리 의혹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지자, 검찰총장 직속으로 5공비리 특별수사부가 설치돼 수사에 돌입했다. 하지만 당시 검찰총장이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전 전 대통령은 수사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복수의 신문을 통해 보도된 12·12 및 5·18사건과 전두환·노태우 권력형 부정 축재사건에 대한 1심 판결문에는 전두환은 1982년~1987년까지 ‘청와대 혹은 인근 안가’에서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을 7차례 만나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 등 대형 국책사업자 선정·금융 및 세제 운용과 관련해 다른 기업보다 우대하거나 불이익 없도록 선처해 달라는 취지로 220억 원을 받았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청와대를 8차례나 찾은 삼성 이병철 회장도 220억 원을 건넸다. 한진 조중훈 회장은 1980년~1987년 항공운송사업에 대한 규제 등 기업 경영에 불이익이 없도록 해달라거나 세무조사 완화를 청탁하는 취지로 160억 원을 냈다.

선경 최종현·롯데 신격호 회장 150억 원, 럭키금성(엘지) 구자경 회장 100억 원, 한국화약(한화) 김승연·금호 박성용 회장이 각각 70억 원을 주었다. 전두환에게 출연금을 낸 재벌 총수들은 기소되지 않았다. 공소시효(5년)가 지났다는 이유에서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 “안주면 안줬다 패고”…사이다발언 주목
일각에선 자성목소리 나오기도…정경유착 고리 끊자 선언도


다만 1997년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추징금 2205억 원, 2628억 원을 선고한다. 두 사람에게 뇌물을 준 사유로 처벌을 받은 재벌 총수는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8명뿐이다. 이들 가운데 7명은 대법원 확정판결 여섯 달 만에 ‘특별사면·복권’됐다. 김영삼 정부는 1997년 개천절 특별사면 명단에 뇌물공여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이건희·김우중 회장 등 7명을 포함시켰다.

당시 재계서열 6위까지 올랐던 국제그룹 해체 과정도 여전히 의문을 남긴다. 그룹이 돌연 해체하게 된 배경에 전두환 정권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가 많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으며 전두환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양정모 회장이 늦는 등 눈 밖에 날 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동종업계 사이에서도 국제그룹이 일해재단에 돈을 내지 않아 그룹 해체를 맞게 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1985년 전두환 정권 하에서 그룹이 1주일 만에 해체되는 유례없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이후 주력 계열사였던 국제종합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에, 나머지 계열사와 국제그룹 사옥은 한일그룹에 각각 매각됐다.

양 전 회장은 5공이 끝난 뒤인 1993년 국제그룹 해체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해 승소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등을 맞으며 그룹 재건에 실패해 국제그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공정거래위원회 ‘한국재벌사’ 자료에 따르면 신진자동차공업은 1972년 기준 재계 서열 4위에 올랐던 기업이다. 기술 제휴를 통해 ‘신진 코로나(1966)’를 생산하면서 자동차 산업의 붐과 함께 대기업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당시 코로나의 가격은 83만원을 호가했다. 소고기 한 근에 200원 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신진자동차는 정부의 권유로 당시 적자를 기록 중이던 한국기계(현 대우중공업)를 인수(1969)하게 된다. 설상가상 1972년 토요타자동차가 한국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한다. 중국이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와 관계를 맺는 나라까지도 거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중국 시장 진출을 꿈꿨던 토요타자동차는 대만과 국교를 맺었던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신진자동차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제너럴모터스(GM)과 기술제휴를 맺고 GM코리아를 설립했다. 이후 ‘쉐보레 1700’, ‘카미나’, ‘레코드 1900’ 등의 모델을 출시했으나 현대기아차 등 후발주자와의 경쟁에서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76년 한국 측 지분을 산업은행이 인수, 새한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했지만 1978년에 산업은행이 보유지분을 대우그룹에 넘기면서 1983년 대우자동차(현재 한국GM)가 출범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역시 2000년 도산하면서 2001년 GM이 대우의 승용차부문을 인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1년 현대의 세무사찰에 이은 세금폭탄 사건도 있었다.  1991년 8월 서울 계동 현대그룹 본사에 국세청 조사요원 40여 명이 들이닥쳐 ‘60대 그룹 총수의 8촌 이내 재산변동 현황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진행한 세무사찰에 대해 항간에는 ‘권력과 현대의 불화에 따른 청와대 하명(下命) 조사’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석 달 넘는 세무사찰 끝에 현대는 1309억 원의 세금 폭탄을 맞아 정 명예회장은 “돈이 없어 세금 못 내겠다”고 버텼고, 노태우 대통령은 “현대 계열사 한두 곳을 당장 부도 처리하라”고 호통쳤다고 한다.

총수 구속·세무조사 등 악전고투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포철이 세무사찰을 당한 것도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후보 지원을 거부했던 박태준 회장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김대중 정권 때도 한양주택, 신동아그룹 등이 수난을 겪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현물지원사업으로 총 2243억 원을 민간으로부터 지원받아 북한에 무상지원했다. 그중에서 1999년 5월 대한적십자사는 대북비료보내기 사업과 관련해 전경련 80억 원, 대한상공회의소 10억 원, 한국무역협회 10억 원 등 총 100억 원을 경제단체에 지원 요청했다.  이때도 정부가 경제단체에 대놓고 돈을 요구해 논란이 됐었는데 재계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결국 정 명예회장이 총대를 멨다.

당시 정 회장은 북한에 소 떼를 몰고 집적 방북해 김정일 북방위원장을 면담했다. 1998년 6월 1일, 정 회장은 소떼 500마리를 몰고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방북해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켰다. 그는 한 마리라도 더 낳게 하려고 500마리 중에서도 임신한 소를 많이 채워 넣었다 . 게다가 2차 방문인 10월에는 501마리의 소를 끌고 갔었다. 이 소들은 충남 서산 간척지에 조성된 70만 평의 농장에서 키운 3000여 마리의 소 중 일부로, 정 명예회장이 1992년부터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대북사업이 비즈니스 차원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적은 별로 없었다는 게 이 시기 현대그룹에 관여했던 인사들의 대체적인 설명이다. 대북송금을 포함해 금강산·개성공단 준비에 과다출혈이 이어지면서 부실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했고, 관광사업 초기 ‘바람몰이’를 위해 가격을 낮게 책정하는 바람에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적자누적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파산으로 기록된 대우그룹 역시 김대중 정부의 분배와 평등을 강조하는 경제민주화와 대중경제론에 입각해 해체됐다. 김우중 전 회장은 자서전을 통해 당시 경제 정책을 담당한 관료들에 의해 ‘기획해체’ 당했다고 주장했다.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도 과거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선거자금을 내지 않는 등 정권에 밉보인 탓에 회사가 공중분해 됐다고 주장하며 “회사를 다시 찾겠다”고 밝혔다. 

노무현정부는 대기업들로부터 공익재단 설립과 사회공헌사업 및 대중소기업 협력기금을 명목으로 총 2조155억 원을 출연받았다.

한덕수 경제부총리 윤증현 금융위원장이 나서서 양극화 해소 운운하며 금융회사들의 수익사업을 비판하더니 갑자기 금융기관들이 장학재단 공익재단을 만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 규모는 총 940억 원에 달한다.

신한금융지주회사는 500억 원 규모의 신한장학재단, 하나금융지주는 300억 원 규모의 하나금융공익재단, 외환은행은 50억 원 규모의 외환나눔재단, 기업은행은 40억 원 규모의 기은복지재단, 경남은행은 50억 원 규모의 경남은행사랑나눔재단을 설립하였으며, 국민은행은 매년 순이익의 1%를 사회공헌사업 명목으로 환원하기로 했다.

또 에버랜드 전환사채가 문제가 됐던 삼성은 8000억 원 출연을 약속하고, 현대차는 1조 원대 글로비스 지분 60%를 내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특히 삼성 8000억 원 출연금은 민간 기업이 돈을 낸 민간재단을 사실상 노무현 정부가 관리했다는 비판이 다시 일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문화스포츠융성정책 차원에서 기업으로부터 미르·K스포츠재단 774억 원 출연금을 모은 것이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이어진 것과 비교할 때,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논리로 논란이 됐다.

이명박 정부도 서민금융생활지원 및 대중소기업 협력을 이끌어내는 국정과제를 추진하면서 각급 기업들로부터 총 9883억 원의 기부금을 모금한다.

미소금융재단 설립에 따른 기부금 모집으로, 2009년 9월 금융위 주도로 개최된 대통령 주재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는 신용등급이 낮아 제도권 금융이용이 어려운 서민들을 대상으로 저리 대출을 지원하는 미소금융사업을 대폭 확대하기로 하였다. 대기업 및 은행들이 개별적으로 ‘미소금융재단’을 설립하도록 유도했다.

2012년 12월까지 삼성 현대차 롯데 등 기업 미소금융재단 76개 및 우리 국민 신한 하나 은행 미소금융재단 53개가 설립되는데, 2009년 12월부터 1개월 만에 2659억 원을 모금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편, 기금 모집이 우격다짐식으로 진행되면서 기부금 모집에 참여한 민간기업들 사이에서는 ‘팔 비틀기’라는 불만이 적지 않았다.

박근혜정부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 청년 희망재단을 설립하여 총 2230억 원의 기부금을 출연받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미르재단은 2015년 10월 문화콘텐츠기업 육성 등을 목적으로 설립하였으며, 현재까지 기부금은 486억 원으로 삼성 125억 원, 현대차 85억 원, SK가 68억 원 등을 출연했고 현재 467억 원이 잔존한다.

그러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사퇴 압력을 받았다고 시인하면서 한진해운 법정관리 과정에 최순실씨의 영향력이 행사됐을 것이란 소문이 퍼지고 있다. 미르재단에 10억 원이라는 적은 액수를 출연해 조 회장이 최 씨의 눈 밖에 났다는 해석이다.

일각에선 정부 비판 목소리도

이렇듯 한국 기업사에 비운의 기업인으로 이름을 올리는 이들과 현재 재기를 노리고 있는 기업인들의 논란 등 이들이 가진 공통적인 키워드는 바로 ‘정경유착’이다. 이로 인해 피해를 입든, 이득을 보든 정경유착이란 시장의 질서를 흐리고, 각종 불법과 비리를 양산하는, 근절돼야 할 구시대의 산물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말 자발적이라면 기업 내부의 자체 논의와 상향식 의사 결정을 통해 기금 규모가 정해져야 하지만, 통상 재계 1위인 삼성이 얼마를 낼지 정하면 나머지 기업들도 서열에 따라 기금을 정하는 식”이라며 “이런 기준보다 많이 내는 기업은 오너가 비리에 연루돼 수감 중이거나 검찰 수사가 진행중인 기업, 각종 인허가 문제가 걸려 있어 ‘성의 표시’가 필요한 기업들”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잘못된 관행을 없애기 위해 기업 자체가 투명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에 반기를 들면 특별 세무조사나 검찰수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정권의 압박에 기업이 순순히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그만큼 약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간 기업인들 사이에선 청탁보다 청탁 거절이 더 어렵다는 하소연이 많았다. 한 기업 관계자는 “동문 선배, 친척, 옛 상사의 청탁을 거절했다간 자기를 무시한다며 앙심을 품기 일쑤여서 이를 거절하려면 의절하거나 왕따를 당할 각오까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청탁을 거절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기업하기 싫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정권에 잘 보이면 5년이 편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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