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 기자] 연극 <청춘예찬>이 2월 12일까지 ‘아트포레스트 아트홀’에서 공연된다.
 
<청춘예찬>은 주목받지 못하는 도입부로 시작한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청년’은 관객 사이를 조용히 두리번거리며 배회한다. 객석의 불빛은 아직 꺼지지 않고 김광석의 배경음악도 그대로 틀어놓아 관객들은 교복 입은 청년을 신경 쓰지 않고 떠든다. 도입부는 무대로 시선이 집중되기 전 잠깐의 시간을 활용하는 데 관객의 주목하지 않는 모습이 연출을 더 효과적으로 완성한다. 우울한 포크송과 함께 주인공 캐릭터가 어느 정도 전달되며 청년과 무대배경 사이에 어떤 분위기가 이어질지 일러준다.
 
<청춘예찬>에는 행복해 보이는 인물이 없다. 앞으로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믿지도 않으며 그러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현실의 가난과 폭력에 깔려 행복이라 보기에는 너무 어둡고 작은 것을 막연히 기다리는 정도다. 이 막연함은 자포자기 또는 반항이나 부정에 가까워 인물 모두는 삶을 ‘소극적으로’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청춘예찬>이라는 제목을 단순히 반어적으로 본다면, 소외된 계층의 현실 반영에 의의를 두겠지만 공연은 그 부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청년, 아버지, 여자, 선생, 어머니, 용필, 예쁜이, 수발이는 각자의 식대로 청춘을(인생을) 예찬한다. 가진 것 없고 아는 것 없는 그들의 예찬 방식은 많지 않다. 생각과 고민을 거듭하는 것, 학교에 가지 않는 것,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 거짓말하고 돈 뜯어내는 것, 남을 때리고 자신을 간접적으로 학대하거나 모든 답답함을 바깥 어디든 쏟아내는 것, 모두 다 내 잘못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등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청춘을 단념하고 더럽히는 것으로 알던 행위들이 신체적 불구, 폐인, 양아치, 약자들에게는 달리 선택할 수 없는 예찬이 된다. 관객은 이들의 생이 가보지 못한 길이며 가고 싶지 않은 길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갖는다. 호기심을 시작으로 우리와 비슷한 단면을 본다. 거기에는 동정심과 부끄러움이 있고 배려와 설렘 후회와 상처 유머와 진지함이 있다. 잠깐 빛나는 이것들은 인물의 추억 속에서 조건 없는 희생 속에서 나타난다.

 
  2004년에도 <청춘예찬>을 본 적 있다. 22살로 등장하는 청년보다 어릴 때였다. 좁고 낡은 집에서 검정 양말을 벗는 청년과 발길질하는 아버지의 기억이 전부였던 공연이었다. 다시 본 아버지는 그때보다 약했다. 아들을 발로 차는 당시 꽤 강렬했던 장면은 늙기 위해 사는 지금의 모습 속에서 힘을 잃었다. ‘개 같은 아버지’마저도 품는 어머니와 담배 따위를 마약이라고 간주하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용필의 모습은 시대의 단면을 넓게 비추는 것 같아서 짠했다. <청춘예찬>은 이날 많은 자리를 차치했던 어린 관객들보다는 청춘의 가능성을 흘려보낸 이들에게 좀 더 와 닿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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