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유엔군 함정 18척, 北 열차 28편 파괴
6.25전쟁 戰史, 국군 감쪽같이 속은 북한군 기만전술
 
“미국 함포하고 비행기가 죽기 살기로 철로를 깠어요(공격했어요). 한 번 쐈다 하면 무지막지했소. 여러 번 죽었다가 살아났소” 6.25전쟁 당시 북한군 철도 초소병으로 근무했던 최모씨는 지난 201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엔군 소속 함정이 동해안에 부설된 철로를 따라 이동하는 북한의 군용열차를 파괴하던 장면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2010년 당시 국방부 6.25전쟁 제60주년사업단에 따르면 6.25전쟁 중 18척의 함정이 모두 28편의 북한 군용열차를 파괴했다. 동해 해안선을 따라 부설된 철로를 이용해 각종 무기와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던 북한의 군용열차가 유엔군 구축함의 사냥감이 됐다는 것. 6.25전쟁 중 미국 해군은 거의 동해안에서 작전을 펼쳤고 군용 열차와 같은 육상의 표적을 향해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동해를 끼고 달리던 북한 열차들은 구축함의 함포 사정권에 있었고, 포격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북한의 동해 군용열차는 미국 함정의 표적이 된 것을 알면서도 대량 수송수단이 열차밖에 없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지옥의 선로’를 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두만강을 건너 보내오는 군수품을 동부전선으로 보급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열차였기 때문이었다. 군용열차는 낮에는 터널 속에 쉬다가 밤이면 운행했다. 유엔군 함정은 밤이 되면 해안가로 다가와 철로를 감시하다가 연통에서 날리는 불꽃을 보면 가차없이 포격을 가해 열차를 파괴시켰다.

유엔군은 동해안 열차 파괴에 성공한 군함들에게 ‘트레인 버스터 클럽 멤버’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미국 공군 조종사들이 적기 5기를 격추할 때 부여하는 에이스의 칭호를 본 떠 해군이 급조한 명예호칭이었다. 6.25전쟁 기간 18척의 함정이 트레인 버스터 클럽 멤버가 됐다. 주로 미국, 네덜란드, 캐나다 함정이었다.

미 구축함인 올렉함의 야간열차 파괴 사실은 6.25전쟁 당시 해군의 활약상을 담은 ‘US Navy In Korea’란 책에 기술되어 있다. 1951년 당직 사관인 크래파크 대위는 견시(見視)병으로부터 열차가 남쪽으로 향한다는 보고를 받고 함내 전투배치를 명령했다. 함수를 열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돌린 뒤 전방 포탑 4문과 후방 포탑 2문을 육지 방향으로 조준했다.

조명탄과 함께 6문의 5인치 포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열차는 터널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마지막 차량에 포탄이 명중되면서 폭발했고 열차는 탈선했다. 올렉함은 탈선한 기차를 행해 조준사격을 가해 모두 파괴시켰다. 다음날 항공 정찰 결과, 무기를 가득 실은 다섯 량과 탱크를 실은 한량, 총포탄을 실은 아홉 량의 열차가 파괴됐다. 올렉함은 이후 한 차례 더 군용열차를 사냥했다.

북한군 철도 초소를 지키던 최모씨는 바다가 보이는 고지 뒤쪽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동안 미군 헬기가 정찰을 하는가 하더니 어느덧 함포 사격이 이어졌고, 결국 한 쪽 귀의 고막이 파열됐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 함정이 해안가로 바짝 이동해도 별다른 대응 수단이 없어 지켜봐야만 했다고 말했다.

‘트레인 버스터 클럽 멤버’ 호칭을 받은 함정은 군용 열차 3편을 파괴한 엔디코트함을 비롯한 포터함, 자르비스함, 트라텐함, 에버솔함, 챈들러함, 칼믹함, 매독스함, 멕코이함, 레이놀즈함 등이다.

한편, 6.25전쟁 전사(戰史)에는 북한군이 국군을 감쪽같이 속였던 기만전술도 기록되어 있다. 적을 속이는 기만전술은 소련군이 독일군과 싸우면서 구사했던 ‘치사한 교리’로 북한군이 소련군에서 배운 작전술의 일환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0년 당시 국방부 6.25전쟁 60주년사업단에 따르면 1950년 6월 28일 국군 6사단 7연대가 강원도 춘천시 남방 원창현 고개에서 북한군의 기만전술에 당해 곤욕을 겪었다.

6사단 7연대는 전쟁 개전 초기 춘천방면으로 남침하는 북한군을 격퇴해 국군의 체면을 살려준 용맹스런 부대였지만 북한군 1개 중대의 기만술에 속아 뼈아픈 일격을 당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7연대는 6월 28일 육군본부의 지시에 따라 남쪽으로 철수하면서 예하 2대대를 원창현 고개에 배치했다. 이 고개는 춘천 분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해발 600m의 고지였다. 산세가 험하지 않고 잡목만 우거져 매복이 쉬웠고 고개로 올라오는 길이 구불구불해서 적을 기습하기 좋은 곳이었다. 6월 28일 오후 2시께 2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원창현 고개로 접근했고, 7연대 2대대는 적의 선두부대가 300m 전방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당시 7연대는 다른 연대들이 북한군과 격전을 치르는 동안 춘천 남쪽 식사리 인근에서 북한군 2사단을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전투다운 전투를 치러보지 않은 상태였다. 부대원들 사이에서는 후퇴 명령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며 상당한 불만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2대대장의 입에서 드디어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장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 아래로 접근한 북한군 선두부대를 향해 화력을 쏟아부었다. 고개 지형상 도피로가 없었던 북한군은 속수무책 쓰러져 갔다. 2시간 가까이 화력을 퍼붓자 생존한 북한군들이 하나둘씩 백기를 흔들었다.

손수건이나 웃옷을 벗어 흔들었고 심지어 일부 북한군 병사는 주머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어 투항 의사를 표시했다. 한 손에 따발총을, 다른 손에 태극기나 수건을 들고 투항 의사를 표명한 것. 투항한 북한군 병력은 1개 중대 규모였다.

대대장은 투항하는 병력 중에서 적의 대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안내하도록 연락병을 보냈다. 만사 체념한 듯 얌전히 다가오던 북한군이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며 따발총을 난사하며 기습공격을 가했다.

2대대는 다급하게 총을 들어 반격하려 했지만 이미 기만전술 각본대로 덤벼드는 북한군을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북한군 부대는 악랄하기로 소문난 최현(전후 민족보위상 임명)이 이끌었다.

비록 북한군은 기만전술을 이용해 사지(死地)에서 탈출했지만 6사단 7연대 2대대에게 큰 타격을 입고 원래 작전계획을 수정, 경기도 가평 방면으로 이동로를 변경했다.

젊었던 국군이 북한군의 기만전술에 경험이 없어 급습을 당했던 전투 사례였지만 6사단 7연대 2대대는 며칠 뒤 충북 진천의 동락리에서 북한군 1개 연대를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우게 된다. 전쟁 초기 6사단이 극과 극을 오갔던 ‘풍운의 사단’이란 별칭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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