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賢者, 현인)의 사전적 의미는 어질고 총명해 성인(聖人)에 다음가는 사람을 뜻한다. 중국에서는 주(周)나라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을 정벌할 때 신하가 천자를 토벌하는 것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반대하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대표적인 현자로 칭송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개국을 반대해서 끝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고려의 유신인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과 왕명으로 내려진 출정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한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 일흔이 넘은 노구로 신구차(伸救箚, 목숨을 걸고 구명하는 상소문)를 올린 ‘약포(藥圃) 정탁(鄭琢)’을 들 수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순신은 훗날 “나를 추천한 이는 서애(류성룡)요, 나를 구해준 이는 약포(정탁)”라 했다. 정탁의 차자(箚子, 상소문)가 없었다면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명량해전도 없었을 것이며, 오늘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다.

1597년 당시 조정의 여론은 이순신을 추천한 류성룡을 몰아내기 위한 서인들의 음모로 공정하지 못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회·언론·검찰·특검·헌재가 420년 전의 조선 조정을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J.스위프트의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는 당대 영국의 정치·사회적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재판관들에 대해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된 사람들을 재판하는 방법은 매우 짧아서 칭찬할만하다. 재판관은 먼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본다. 그런 다음에는 법률에 전혀 위반되지 않고 간단하게 교수형을 선고하거나 살려준다”며 권력의 시녀가 된 법원의 실상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법조인들은 생래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세사(世事)에 신경을 끊고 초연하게 처신하며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잘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원로 법조인 9인의 경우는 달랐다. 이들은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2016.12.9)한 2개월 후인 지난 2월 9일에 ‘탄핵심판에 관한 법조인의 의견’이라는 일간신문 광고를 냈다. 실로 우리 법조계 초유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었다. 이들이야 말로 ‘현대판 9인의 현자(賢者)’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로 연판장’에 이름을 올린 현자들은 이시윤 전 헌재 재판관, 정기승 전 대법관, 김문희 전 헌재 재판관, 이세중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김두현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이종순 전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회장, 김종표 원로 변호사, 함정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김평우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이다. 2월 14일 광고에는 박만호 전 대법관이 이름을 추가했다.

원로 법조인들은 대통령 탄핵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주장했다. “현 정국에선 아무리 성명을 내도 신문에 안 실어줄 게 뻔하니 차라리 광고를 내기로 한 거다.” “선(先) 증거수집 후(後) 소추가 기본 원칙이다. 특검을 먼저 하고 결과가 나오면 소추를 했어야 했는데 국회가 너무 성급했다.” “‘대통령의 7시간’을 분 단위로 내라고 한 재판관의 진의가 궁금하다. 재판관은 판결로 말한다. 사전에 유불리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은 철저히 삼가야 한다.” “3월 13일까지 결정하라고 안팎에서 압박을 하는 것은 사법권 침해다.” “‘섞어찌개 일괄투표와 탄핵사유’는 위헌이다” “‘피청구인 측이 지연 전술을 쓰고 있다’고 소추인 측에서 얘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신중한 심리를 저해하는 거다. 180일이 보장되어 있다.” 촛불과 야합한 언론의 편파보도와 인민재판, 정권찬탈을 위한 국회의 절차적 위헌성과 법률위반, 헌재의 졸속재판과 편파적 심리를 나무란 것이다.

최근 세월호 참사 당일 정부종합청사에 승용차가 돌진하는 테러가 있어 대통령의 중대본 방문이 늦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한 고영태와 그 일당의 국정농단 녹취록이 초미의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지만 특검은 수사하지 않고, 헌재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고영태 일당과 협잡하여 국가반역을 기도한 현직검사(또는 검사장)의 신원을 제보해 주는 사람에게 현상금 1억원을 주겠다는 신문광고도 등장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위한 법치와 국가사법권이 형해화(形骸化) 되고 있다는 증좌인 것이다.

헌재 재판관들은 여론에 휘둘리지 말고 헌법만 생각하고 사실만 보고 판결해야 한다. 촛불이 광장에 나올 때마다 대통령이 물러난다면 대한민국은 ‘탄핵공화국’이 되고 말 것이다. 잘못된 선례가 판례가 되면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불행한 대통령이 되고 말 것이다. 최근 정치권과 언론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대통령 자진 하야론’은 실효성이 없을 뿐더러 재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제해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관 9명은 ‘9인의 현자’로도 불리는데, 이들 때문에 연방대법원이 가장 신뢰받는 국가기관이 됐다. 미국 국민들은 연방대법관들이 시대를 통찰하는 예지력으로 현명한 판결을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제, 우리 헌재 재판관들은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 신중하고 공정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법복 입은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벗고 미국의 연방대법관처럼 ‘나라를 구한 현자’로 역사에 기록되길 기대한다.

우종철 자하문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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