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 있는 그대, 보고 싶었다. 항상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되뇌던 당신의 이름, 발칸.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에서 보냈던 꿈같고 때론 여운 깊은 영화와 같았던 기억들. 이제 잡지 못하고 놓지도 못한 채 그 속에서 흘러간 집시의 시간을 추억할 때. 잊힌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방법, 발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 이 심정적, 지리적으로 먼 낯선 이름의 나라들은 줄곧 유고슬라비아로 기억되고 있었다. 현재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그리고 마케도니아는 이들과 함께 과거의 유고 연방에 포함돼 있는 나라들이었다.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소련의 붕괴로 각자의 이름을 되찾은 이들은 발칸이라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지역으로 묶였고 각자의 나라로 다시 자리를 찾았다. 보스니아의 순박함과 유연함, 몬테네그로의 경건함과 간결함 그리고 세르비아의 자존감과 화려함. 이들의 문화와 기질 그리고 역사와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서로 분명히 다르고 또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슬픔과 아픔이 정확히 교차했고 동시에 공존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간 그들. 그들이 보여주었던 것 그리고 그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 그것은 바로 우리는 발칸의 사람들이고 지금은 발칸의 시간이라는 것.

 
몬테네그로

몬테(Monte)-산 네그로(Negro)-검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산이 유달리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국호가 됐다. 하지만 보스니아에서 넘어와 항구도시인 티바트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와 닿는 색채적 감각은 ‘검다’보다 ‘파랗다’였다. 익숙한 바다 빛 그리고 그 위에 얹힌 푸른빛. 맞다, 지중해에서 만났던 그 익숙한 블루.
몬테네그로 식 산책, 코토르

코토르는 티바트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몬테네그로 최고의 관광지다. 아드리아해 연안을 여행하는 많은 개별 여행자들은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를 지나 조금 더 아래쪽에 위치한 이 도시를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코토르는 중세 세르비아의 한 왕가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전체 길이가 4.5km에 달하는 굳건한 성벽과 중세시대의 건축물과 분위기가 잘 보존되고 있는 구시가지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벽 정상에서는 동유럽 최고의 리아스식 해변을 감상할 수 있으며 같은 발칸 국가이며 슬라브계인 보스니아와 이웃하지만 문화와 풍습 등이 라틴계인 바다 건너 이탈리아와 조금 더 가까운 느낌이다. 코토르 항구에는 커다란 크루즈가 정박해 있고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요새의 성벽은 견고하며 언제나 주변은 차들의 소음으로 분주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은 느긋하고 여유롭다. 거친 돌산인 로부첸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또 바로 앞의 바다와 함께하고 있는 코토르에 온 이상 코토르식 산책은 당연한 걸음. 1555년 건축됐다는 서쪽 문을 통해 코토르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드디어 코토르만이 가지고 있는 작은 세계에 들어가는 셈이다.

이 크지 않은 공간에 12세기에 건축된 성당과 1300년대에 지어진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 많은 궁전들과 프랑스 극장 등 볼거리가 가득해 흔한 표현인 보석 상자보다는 보석 궁전에 가깝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칭호는 코토르에 주어진 너무나 당연한 왕관.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계탑이 보인다. 단순한 시계탑이지만 지어진지 무려 400년이 넘는 코토르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로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서쪽의 문으로 나올 때까지 현지인의 집들과 대표적인 건축물들은 물론 레스토랑과 기념품 숍, 호텔 등이 이어진다.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성 트뤼폰 성당은 1166년에 건축됐는데 원래 809년 코토르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트뤼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옛 교회 터에 지어졌으므로 실제 건축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천 년이 넘는다.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바로크 양식들이 혼재돼 있으며 코토르에 있는 두 개의 가톨릭 성당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코토르에서 남쪽으로 아드리아 해를 면하고 있는 곳에 부드바라는 도시가 있는데 2500년 동안 무역항으로 서유럽과 동유럽을 잇는 거점 역할을 한 탓에 아드리아 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들 가운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로 기록된다. 작지만 한때 바다를 호령했던 국가로서 몬테네그로에서 해양 박물관은 다른 나라의 국립박물관보다 중요한 박물관이다.

코토르의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성 니콜라스 정교회를 지나 성벽의 외곽에 서면 해자를 기준으로 코토르의 현재 시가지와 구시가지가 나뉘어 보인다. 현재와 과거로 다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 모두 코토르이고 코토르가 다 함께 아우르기 때문이다.

이제 코토르를 떠날 시간, 단지 시간 계산을 잘못한 탓에 성벽의 정상에 올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피요르드의 풍광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 마법과도 같은 코토르의 미로에 빠지지 않으려면 시간 분배를 잘 할 것. 그것이 이 코토르의 서쪽 문을 통과해 들어오면 시계탑이 바로 앞에 보이는 비밀이다.

<tip>
서쪽 문으로 들어가기 전 여행안내소가 있다. 한국어로 된 지도가 구비되어 있으니 지참하면 좋다.

<infor> 성 조지섬의 슬픈 동화
1797년 나폴레옹 군대가 이곳을 점령했다. 한 병사가 아름다운 페라스트 여인과 한눈에 사랑에 빠졌지만 명령에 따라 마을을 포격하는 바람에 여인은 죽고 만다. 이를 알리지 못한 죄책감으로 병사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이곳을 다시 찾아 섬으로 들어가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

두 개의 섬 하나의 동화, 페라스트

 
숙소를 나와 작은 바닷가 마을 페라스트로 가는 길. 몬테네그로는 아드리아 해에 면한 작은 나라지만 산이 많고 계곡이 깊어 일부 도심 구간을 제외하면 나라 이름 그대로 산악 지형인 국가이다.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협곡인 타라 캐년도 몬테네그로 북부에 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면 산 아래로 파란색의 비단에 은빛 보석을 수놓은 것 같은 바다가 펼쳐지고, 과거 15세기 초부터 이 지역을 호령하며 그 옛날 조선소가 네 곳이나 있을 정도로 번성했다는 페라스트가 모습을 보인다. 호젓한 해변 돌바닥을 따라 걷다보면 아기자기한 페라스트 마을의 모습보다는 눈앞에 산들이 마치 기웃거리듯 보호하듯 병풍처럼 막아서고 그 앞에 차마 손으로는 다루지 못해 어쩔 줄 모르겠는 듯 두 개의 보석을 바다에 띄워 놓은 것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두 개의 섬인 성 조지 섬과 바위의 성모 섬. 두 섬은 바다 한가운데에 조용히 나직이 느리게 천천히, 세상의 온갖 느림을 곁에 두고 페라스트를 꾸미고 있다. 먼저 섬으로 건너가기 전에 마을을 둘러본다. 섬은 눈앞에 언제나 있으므로 서두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골목골목 배어있는 짙은 아이보리 벽의 따스한 질감과 평범한 사람들의 단순한 일상은 관광객들과 섞여도 전혀 이질감이 없고 서로 자연스럽게 동화되고 스며든다. 발칸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어디선가 느꼈던 익숙함, 두 개의 섬이 페라스트의 얼굴이라면 마을은 페라스트의 마음 속.

배를 타고 섬을 향해 바다를 건넌다. 성 조지섬은 배가 닿지 않지만 바위의 성모 섬에는 내릴 수 있다. 무척 짧은 여정이지만 분명히 푸른 아드리아 해의 물이 스며드는 곳이기에 일부러 손을 뻗어 물에 담가 보았다.

빠르게 지나쳤지만 분명히 내 손에 닿은 감촉. 아드리아 해의 따스함이기에 그 기억이 깊다. 인공섬인 바위의 성모 섬은 원래 바위 한 개만 바다 위에 덩그러니 있었지만 1452년 이곳을 지나던 베네치아 어부가 바위 위에서 성화를 발견한 후 지역 주민들이 수백 년 동안 바위를 쌓아 섬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아직도 페라스트 주민들은 성당을 세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7월 22일에 바다로 나가 돌을 던지는 행 사를 한다고 한다. 섬에는 1630년에 만들어진 작은 교회가 있다. 교회 내부의 벽에는 크고 작은 은판들이 장식돼 있는데 이는 어부들이 무사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스스로 징표로 만들었던 것. 그들의 소망은 그저 안전한 귀가였지만 어쩌면 그 작은 소망이 가장 절실했을 것이다.

2층의 성화와 성물들이 전시돼 있는 작은 박물관을 지나 섬 끝에 있는 작은 등대에 서면 이 섬의 여행은 끝난 셈. 작은 공간이었지만 이상하게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 그리고 딱 알맞게 주변에 머물러주던 아드리아의 바다. 햇빛을 받아 온기를 머금은 크림색의 외벽, 일부러 덧칠을 하지 않은 하늘색의 둥근 돔 그리고 주황색 지붕 아래 있었던 동화 같은 시간. 다시 배를 타고 페라스트로 돌아오는 물길. 바다 위에 잔잔하게 꽃잎처럼 떠있는 두 섬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확실히 페라스트와 아드리아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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